진보하는 미국, 퇴보하는 한국
진보하는 미국, 퇴보하는 한국
  • 한관호
  • 승인 2009.01.21 18:33
  • 호수 2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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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해본다.
배고픔이 일상이던 초등학교 시절, 미국은 우리에게 구세주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교에서 어른 주먹만 한 식빵과 우유를 나눠 주었다. 하루 세끼 중 한 끼는 밥이 아닌 고구마 몇 개로 건너던 시절, 게다가 처음 먹어보는 빵과 우유인지라 얼마나 맛나던지.
또 분유도 나눠주곤 했는데 그 달 짝 지근한 맛의 유혹을 참지 못해 집에 가는 내내 조금씩 먹다보면 겨우 한 줌 정도가 남곤 했었다. 그 빵과 우유와 분유가 모두 미국이란 나라에서 공짜로 보내주는 거라고 했다. 식빵을 통해 교과서를 통해 미국은 우리에게 은혜로운 나라였다. 그렇게 동경의 대상이던 미국, 허나 철이 들면서 미국에 대한 환상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에 대한 호의가 깨지기 시작한 건 한권의 책을 만나면서였다. 지금은 오마이 뉴스 대표를 맡고 있는 오연호씨가 쓴 ‘식민지의 아들에게’란 책이었다. 광주 5.18 항쟁에 대한 미국의 역할, 한국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살인이 비일비재하고 군산에서는 염소를 먹이던 중학생을 정 조준해 쏴 죽이는 등 미군이 저지른 온갖 만행이 그려져 있다.

마산 수출지유지역에 미국 텐디그룹 계열사인 TC라는 전자회사가 있었다. 저임금으로 부를 축적하던 그 회사는 각성한 일꾼들이 노동조합을 생기자 전면적인 탄압에 나섰다. 구사대들을 시켜 여성노동자들을 짓이겨 놓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고 더러는 업무 방해를 걸어 감옥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종국에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홀연히 미국으로 철수해버렸다. 그들의 형태를 통해 지구 반대편쯤에 있는 그 먼 나라가, 자기 먹을 것을 기꺼이 나눠주었던 그 고마운 나라가 실상은 세계 곳곳에서 억압과 착취와 만행을 일삼고 있는 제국주의란 걸 알았다.

뿐만이 아니다. 칠레 국민이 투표로 당선 시킨 아옌데 대통령을 미국이 개입하여 대통령궁에서 자국 군인에게 총살당하게 했다. 그렇게 약소국가들을 침탈하고 꼭두각시를 내세워 뒤에서 조종하며 민중을 억압하는 독재자들을 양산해 냈다.
그런 패권주의 미국이, 백인우월주의로 인종 편견이 극심했던 나라가 흑인 대통령을 뽑았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한 여성 흑인의 통한의 눈물을 보았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짐승취급 당하며 살아온 세월, 빙하로 굳어있던 흑인들의 한이 녹아내리는 눈물이었다.

오늘 새벽 오바마 취임식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흑인, 백인, 연예인, 노숙자 등 무려 200여만명이 참석한 취임식에서 아랍권과 북한 등 적대 관계인 나라와도 소통하는 외교 기조를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민에겐 책임과 봉사로 경제위기를 돌파하자고 호소했다.
취임 며칠 전 오바마는 한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에 맞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의 입장이 정당하다고 밝혔다. 그러자 회사를 담보하던 은행에서 노동자들과 협의에 나서 퇴직금 지급 등을 합의했다. 2004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흑인도 백인도 아닌 오로지 하나된 미국’을 주창했던 그, 그는 그렇게 소수와 약자의 권리를 먼저 인정하는 사회, 세계와 소통하고 협력하는 진보하는 새로운 미국 건설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가.
오바마 취임 하루 앞 날, 서울 용산에서 6명이 불에 타 죽었다. 한강로 2가 재개발 지역, 철거민 50여명이 5층 건물에서 농성 중이었고 특공대까지 동원한 경찰이 강제진압에 나섰다. 아침 6시경, 살수차를 동원해 물대포를 쏘며 진압에 나선 경찰을 피해 망루에 몰린 철거민들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불이 났다. 경찰은 농성장에 인화성이 강한 시너 70여통이 있어 자칫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데도 진압을 강행했다. 무엇이 그리 조급했던가. 어떤 협의의 노력도 없이 농성한지 단 이틀 만에 곧 바로 무력을 사용하게 한 이가 차기 경찰청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맹목적인 충성심이 애꿎은 인명 사상을 낳았다는 비판이다.

그 보도를 보면서 과거 군사독재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목표만을 향해 돌진하는 권력, 그들의 눈에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그저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국민의 목숨쯤은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런 결과 수 백 명의 광주시민이 죽고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애먼 목숨을 잃었다. 최근 들어 경찰과 검찰이 앞 다투어 불법집단행동 운운하며 폭압정치를 예견하고 있다. 미네르바 구속에서 보듯이 민의를 봉쇄하고 언론까지 옥죄려 든다.    

한 나라에선 인종을 넘어 종교를 넘어 소수와 다수, 약자와 강자가 소통하고 화합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 잃어버린 8년을 뒤로하고 진보하고 있다. 다른 한 나라에선 민의와 민주를 억누르며 진보한 10년을 거슬러 과거로 퇴보하려 하고 있다.
겨울이 끝나가나 보다 했는데 봄이 아니라 다시 또 겨울이 시작되려나. 머리끝이 송연해지는 설 들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