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보도지침
되살아난 보도지침
  • 한관호
  • 승인 2009.02.18 20:14
  • 호수 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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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지역언론연대 사무총장·칼럼니스트

어느 날 친구에게 ‘백화점에는 창문이 없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어쩌다 들른 백화점에서 나만 아는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며 자랑하듯 던진 질문이었다. 헌데 돌아온 대답은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였다. 너 이거 모르지 했다가 바보 취급 당했다. 머쓱해진 필자에게 ‘고객이 창밖을 볼 수 없어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을 한다’ 는 백화점 상술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고 보니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았을 뿐 정작 그 뒤에 있는 본질은 보지 못했다.   

김수환 전 추기경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 조문객이 벌써 10만이 넘는다는 보도인데 그 면면들 가운데 눈에 띄는 이가 있다. 추기경과 불편한 관계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그는 전직 대통령들 가운데서도 유독 ‘백화점 상술’을 정치에 적절히 활용했던 이였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지라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군부는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려 안간힘을 썼다. ‘정의로운 사회 구현’ 운운하며 사회정화란 명분을 내걸고 온갖 탄압을 자행했다, 먼저 난립하는 사이비 언론을 정리한다며 일도 일사 체제 등 언론을 강제로 통폐합 해 국민의 눈과 귀를 어둡게 했다.

저유가 덕에 힘입어 경제사정이 나은 틈을 이용해 프로야구를 출범시키는 등 스포츠산업을 활성화하고 성 산업을 부추기고 여의도에서 국풍81이란 축제를 여는 등 3S로 일컬어지는 소비, 향락문화를 범람시켰다.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하려는 술책이었다. 지금도 폭압이 판치고 민주주의가 죽어가던 그 시절을 도리어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으니 백성을 우민화 한 그 정책이 정권유지에 기여하기는 했나보다 싶다.

그런 비슷한 꼴이 최근에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 11일, 민주당 김유정 의원이 대정부 질문을 통해 청와대가 용산 사태로 곤란해지자 군포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고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처음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려다 논란이 거세지자 한 행정관이 저지른 개인 행위 일 뿐이라고 변명하고 나섰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보좌하는 행정관이 임의적으로 한 행동이라니, 과연 그럴까.

오마이 뉴스가 입수했다는 문건에는 “용산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연쇄살인사건’의 수사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랍니다”라고 적고 있다.

또 "특히, 홈페이지, 블로그 등 온라인을 통한 홍보는 즉각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있으므로 온라인 홍보팀에 적극적인 컨텐츠 생산과 타 부처와의 공조를 부탁 드립니다"면서 "예를 들면 △연쇄살인 사건 담당 형사 인터뷰 △증거물 사진 등 추가정보 공개 △드라마 CSI와 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비교 △사건 해결에 동원된 경찰관, 전경 등의 연인원 △수사와 수색에 동원된 전의경의 수기"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홍보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 공문은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니 계속 기사거리를 제공해 촛불을 차단하는 데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돼 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청와대 행정관이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애믄 목숨을 여섯이나 잃은 용산참사에 국민들의 분노가 매우 큰데 때 마침 부녀자 8명의 목숨을 빼앗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잡혔으니 이참에 이 사건을 적극 홍보하여 용산참사에 물 타기를 하라고 경찰에 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청와대가 경찰에 내려 보낸 홍보지침은 그 효과가 탁월했다.

민주언론운동연합이 언론보도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메일이 전송된 이후 시차상은 감안하더라도 용산참사 보도는 줄어들고 강호순 사건 보도가 늘어났다고 한다. 더구나 이번 사건과 비슷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사건 때와 비교해서도 보도 건수가 더 많았다는 분석이다.

저자거리의 관심도 용산참사에서 차츰 강호순 사건으로 옮겨가고 있다. 며칠 전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뉴스에 강호순 사건이 보도되자 ‘저런 놈은 재판도 필요 없다. 사형시켜야 한다’고 이구동성이다. 그 행정관의 의도대로 정확히 ‘프레임 전환’ 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 ‘신 보도지침 메일’ 사건은 청와대와 경찰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 떨어진 결과물이다. 청와대와 경찰 모두 용산사태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부정적인 시선을 받자 이를 딴 곳으로 돌리려 했다. 도마뱀 꼬리 자르기 식으로 메일을 작성했던 행정관이 사표를 내는 선에서 그만 덮으려 한다.

그러나 유난히 속도전을 강조하는 이대통령의 청와대에서 사건이 불거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진상 조사에 미온적이고 정확한 사건 개요를 내놓지 않는 터라 의구심만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백화점에 창문이 없어도 국민들의 열린 귀와 눈은 현상뒤에 숨은 본질을 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