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모 기념관 없는 것 가슴 아파”
“이경모 기념관 없는 것 가슴 아파”
  • 최인철
  • 승인 2009.03.18 22:10
  • 호수 3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작가 신윤식이 말하는 이경모

▲ 신윤식 사진작가
광양에서 사진을 업으로 사는 이들에게 이경모 선생은 하나의 부채다. 선생의 족적은 크게는 한국사진사의 첫 장을 연 것이기도 하지만 작게는 광양사진역사의 첫 페이지를 연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후배들로써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고향임에도 선생이 외면당하는 현실이 죄송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는 광양의 어제와 오늘을 담아내는 작업을 놓지 않고 있는 신윤식 작가에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월 그가 펴낸 작품집 ‘햇빛고을 광양’에서도 선생의 흔적은 고스란하다. 해방 전후 광양 모습을 담은 사진 대부분이 선생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신 작가는 “이경모 선생은 고향인 광양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한국사진협회에서는 높게 평가 받고 있는 분이며 한국사진협회를 창립한 멤버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35년 동안 사진작품 하면서 줄곧 광양의 어제 오늘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사진으로 보는 우리 광양역사를 만들고 싶다는 숙제를 내준 분이 바로 이경모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광양의 사진을 자네가 찍소’라고 당부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그는 70년대부터 광양의 현재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는 “작품을 팔지 않는 순수성을 끝내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곧 잊혀져갈 광양의 모습을 기록해 두라고 당부하셨고 그것을 잊지 않고 지금껏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선생의 생전 자주 서신을 교환해 왔다. 그때 마다 광양사진의 현황을 걱정하는 한편 고향을 역사를 채록해 둘 것을 거듭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선생에게 지도받으면서 항상 하신 말씀이 앞으로 광양이 많이 변할 것”이라며 “변하기 전에 광양의 모습을 담아달라는 부탁을 달고 사셨다”며 “그때 광양에는 사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순천으로 사진을 배우러 다녔고 선생의 부탁대로 광양만 해태 사진 등등을 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신 작가는 이후 광양제철소 입지확정 뒤 거리 풍경과 광양항 개발 전 중마동 옛 모습, 하포 간척지 등을 촬영했다.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광양 뿐 아니라 소중한 지역의 자산으로써 평가되고 있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아픈 것은 이경모 선생이다. 나주 동신대에 기념관이 지어졌고 갤러리가 조성돼 개인적인 성취가 이루어졌지만 고향에서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며 “십 수 년 전 광양시에서 박물관을 지어주면 기증하겠다 의사를 선생께서 밝혔지만 예산 없다는 이유로 결국 조절되고 동신대에 박물관이 설립된 것은 지금도 유족들의 한이 되고 있다”고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또 “광양에 기념비라도 세우자는 선생의 제자인 모 교수의 제안도 그때 당시 광양시가 또다시 거절한 것도 슬픈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선생의 작품들이 동의도 받지 않고 기명도 없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오늘 날 해방 전후에 찍은 보도사진들은 허락도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것도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것들이다”며 “이는 명백한 저작권 침해이자 작가 모독이다”며 분개했다.

신 작가는 “이런 상황에서 이제라도  이경모 선생의 박물관이 세워지면 얼마나 좋겠냐”면서 “이번에는 말만 하고 넘어가지 말고 구체적인 계획과 방법으로 나와 선생의 기념관이 건립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세계적인 사진작가 이경모의 기념관이 설립되면 국민은 물론 세계인 누구나 찾아오는 곳 될 것”이라며 “시에서 그릇만 잘 준비해 놓으면 내용은 모든 힘을 다해 준비하도록 각계각층과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더나가 “선생의 유품이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오고 기념관이 세워지면 이는 200년 400년 가는 광양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건물만 지어놓고 내용이 없으면 안 된다. 이제라도 지역의 인물을 발굴하는데 시는 물론 시민 모두가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