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보다 숲을봐야
나무보다 숲을봐야
  • 광양뉴스
  • 승인 2009.04.22 16:35
  • 호수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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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에서 이제 막 도착해 따끈따끈한 ‘시사 인’을 받아 들었다. 커브스토리로 실린 사람을 바꾸는 핀란드 교육의 비밀을 열독 중인데 광양신문 데스크로부터 숙제가 떨어졌다. 편집 기자 두 사람이 내일부터 교육받으러 가는지라 오늘 신문 마감이니 즉시 칼럼을 쓸 것. 주제는 ‘방과 후 우수학생 맞춤형 교육’이란다. 고 3 아들을 두고 있어 부쩍 교육문제에 신경이 쓰이던 터였다. 더구나 서울, 경기, 충남 등 교육감 선거가 연이어 치러지고 있어 요즈음 미디어에서도 교육관련 기사가 많아져 관심이 그쪽으로 가 있었다. 

광양시에서 추진하는 방과 후 맞춤형 우수학습반의 골자는 광양 고등학생들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공부를 좀 더 잘하는 일부 학생들을 선발, 그들에게 서울 강남 학생들이나 받는 잘 나가는 과외 교사를 불러내려 성적을 높여주겠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교육행정 또는 학부모 개인이 치러야 할 경비를 광양시가 부담한다는 것이다.

최 기자에게 이런 팩트를 전달 받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1977년인가 보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친구는 문제를 일으켜 전학을 갔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전학 오기 전 학교의 친구들을 만나러 가면서 한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더니 자기는 특별반 수업이 있다고 했다. 학교는 상위 20% 학생들만 따로 모아 정규 수업이 끝난 후 특별 수업을 시켜주고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공부 열심히 하자고 마음 다 잡던 터라 우열반 수업을 받고 싶다고 담임께 상담했다. 결과는 성적이 좋지 않아 안 된다 였다. 

지난 주말 기숙사에 있어야 할 아들이(그 학교는 고 3학생들을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하며 한 달에 한번만 집에 가게 한다) 집에 들렀다. 집에 오는 주말이 아닌데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남해군에서 운영하는 인재스쿨 강의를 듣기 위해 남해대학에 왔단다.

30여년 전, 한 고등학교가 그랬던 것처럼 남해군이란 행정에서도 통칭 인제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광양시에서도 다른 시군에서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거나 도입하려는 이 정책을 시행하려 한다. 다만 30년 전과 다른 건, 그때는 학교 스스로의 정책이었으나 지금은 공동체 구성원 다수를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할 자치단체에서 나섰다는 점이다.  좋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좀 더 잘하게 해주겠다는 데 굳이 시비를 걸고 싶지 않다. 이미 재력을 가진 부모를 둔 자녀들은 특별 과외를 받고 있거나 공부를 잘하는 일부는 외고로 통칭되는 외부 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니 광양시에서 지역에 남아있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나마 우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우미가 되겠다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정책에 깔려있는 광양시의 정책관, 교육관이다. 광양시는 우수 학습반에 참여 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고교 1-2학년생 가운데 성적이 상위 10% 이내에 드는 학생에게만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시민의 세금이 다수가 아닌 일부 극소수를 위해서만 쓰인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나아가 나머지 90% 학생들에게는 위화감, 상실감, 패배의식을 심어 줄 수 도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더구나 공공기관에서 사 교육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게 됐다.

특정 부분에 유능한 사람이 특정 분야에 기여하는 바가 크기는 하다. 그러나 사회를 유지하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자동차를 보자. 엔진만 좋다고 차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진흙탕, 가파른 길을 가리지 않는 바퀴, 각개의 부품을 연결하는 작은 나사못도 꼭 있어야 비로소 꼭 있어야만 자동차가 제 역할을 한다. 기계 하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을 부속물로 인식하는 교육 풍토는 사회적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최근 강릉시 어느 중학교에서는 한 학생이 선거를 통해 반장으로 뽑혔으나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반장 자격을 박탈했다.

더구나 성적까지 공개 돼 인권까지 손상당한 그 학생은 충격과 실의에 빠져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핀란드는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그냥 두고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을 끌어 올리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교육은 한 해 살이 꽃을 피우자는 게 아니라 우람하게 자랄 나무를 키우는 일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눈앞에 나무만 볼 것이 아니라 숲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