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숙이 누님
경숙이 누님
  • 한관호
  • 승인 2009.07.09 09:31
  • 호수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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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게 누나라는 단어였다.
친구들은 거진 누나가 있었던데 비해 필자는 동생만 둘 있는 장남이었다. 어쩌다 친구네에 놀러 가면 먹 거리를 가져다주고 동생에게 그리도 살갑던 누님들. 놀이를 하다가 다툼이 생기면 누가 옳고 그른지는 제쳐 두고 꼭 자기 동생 편을 들던 누님들. 그렇게 누나라는 존재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누나들은 우리가 조금 더 자랐을 때 상급 학교 대신 도시로 나갔다. 아무리 집안 살림 쪼들려도 아들은 공부를 가르쳐야 한다던 시대, 그러자니 입 하나 들고, 동생들 학비 보태고, 아버지에게 소 한 마리라도 사드려야겠기에 누나들은 고무 신 공장 노동자, 식모, 미싱사가 되었다.

내겐 없는 누나들이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자 속 시원하더니 명절이 되면 손에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으로 왔다. 그리곤 누나가 없는 아이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명절이면 누나가 있는 친구들은 영락없이 시골에서는 좀체 볼 수 없던 배 신( 운동화를 배로 만든 신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을 신고 나타나 사람 기를 죽여 놓았다. 게다가 화려한 설빔에다 친구들 손에서 흔들리던 빳빳한 천 원짜리 지폐는 경이로웠다.
헌데, 평생 부재중이리라 여겼던 누나라는 존재가 내게도 생겼다. 경숙이 누님, 나이 서른이 넘어 연을 맺은 그이는 필자의 누나요, 동지요, 지도자였다.   

경숙이 누님은 충남 공주 출생이다. 부농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이는 오빠, 언니들의 사랑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학교를 다녔다. 마치 공주처럼 대접 받으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세파라곤 모를 것 같은 그이였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정신적으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언제나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옷 다 사 입는 자기 가족들, 그에 반해 학비를 못내 선생님에게 치도곤을 당하고 하교 길에 라면 땅 하나 사먹을 용돈이 없는 친구들의 환경이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곤 세상에는 일하지 않으면서도 잘 먹고 잘 사는 부류와 죽어라 일해도 늘 가난하기만 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불평 부당한 세상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더란다.  

공주 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진학한 그이는 그러나 1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접었다. 겨울 방학에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학을 시작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모아 밤에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웃들의 수근그림과 가족들의 질타 속에서도 2년여를 고군분투했지만 비참한 현실은 그대로였다. 그이는 모순 덩어리인 세상을 바로 세우려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러려면 자신의 내공을 더 쌓자고 생각되더란다.
다시 이화여대에 복학했다. 대학 공부를 마친 그이는 짐을 싸 마산으로 내려와 가톨릭여성상담소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공권력과 자본의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평생을 여성노동자들의 사람다운 삶을 위해 엄혹한 시절과 맞섰다.

다국적 기업인 미국 텐디그룹에서 해고를 당한 여성노동자들, 수 십 년이 흘러 중년이 된 그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가는 날, 그이는 자신의 집 거실에서 싸늘한 죽음이 되어 있었다. 노동운동에 투신 한 그날부터 가족들과 연이 끊겨 살아오다 민노당 비례대표로 경남도의원이 되자 오빠가 전세 아파트 하나를 마련해줬다며 그리 좋아라 하더니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에 비로소 생긴 온전한 자신의 쉼터에서 일 년을 채 못살고 떠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대로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다. 이 대통령은 매우 불우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단다. 그러나 그 역경을 딛고 영광스레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경숙이 누님은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면 유복한 집안의 할머니가 되어 손자들 재롱이나 보며 넉넉한 말년을 보내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애초부터 놓아 버린 누님, 자신을 던져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밀알이 되고자 했던 그이다.

대통령의 재산 환원으로 새삼스레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거론되는 요즘이다. 그런 한편으론 인사청문회에 들어 간 검찰총장과 국세청장의 재산 형성을 두고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나 매번 인사청문회에서 나타나는 저급한 탈세 의혹,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거론되고 있다.
검찰총장과 국세청장은 사회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러려면 자신의 삶부터 부도덕한 흠결이 없어야만 영이 설 수 있다. 나아가 참 다운 노블레스 오블리쥬란 내 것이 아닌 것에 애초부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과한 것은 취하기 전에 내치는 것이 아닐까.       
책을 보관하기 위해 강남에 오피스텔을 샀다는 국세청장 청문회를 지켜보며 평생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경숙이 누님이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