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거목이 쓰러졌다
민주화의 거목이 쓰러졌다
  • 최인철
  • 승인 2009.08.20 08:55
  • 호수 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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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 회고

국민들이 큰 슬픔에 빠졌다. 한순간 넋이 나간 듯 했다.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광양읍 천영심(79) 여사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회한의 역사를 함께 해 온 거목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텔레비전은 연신 전하고 있었다. 한국 민주주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했다. 18일 오후 1시 43분의 일이다.
천 여사에게 김 전 대통령은 남편의 친구이자 동지였다. 김대중의 역경과 고난은 곧 남편의 고난과 역경이었고 그 모습을 천 여사는 묵묵히 지켜봤다. 천 여사의 부군은 유신정권부터 광양에서 민주당을 지켜온 김경의(2008년 8월 작고-김종대 광양시민포럼 공동대표의 선친) 옹이다.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유신정권의 정치탄압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된 시절이면 그의 집은 이휘호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이 항상 머무른 곳이다.
면회를 가기 위해 진주까지 가야 했지만 그곳에는 특별한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동지들은 항상 평생 동지이자 친구였던 그의 집을 찾았다. 김 전 대통령도 광양을 방문할 경우 항상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전남 동부권의 민주당 동지들과 밤새 시국을 걱정했다.
당시 스무 살 청년이었던 김종대 시민포럼 대표는 “김 전 대통령님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놓지 않은 의지의 소유자였다. 항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군사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씀했다”며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걱정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김 시민포럼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어머님께서 그렇게 애통해 하실 수가 없다. 모든 기운을 잃은 것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며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이제 아버지가 평생 동지를 만날 테니 두 분이 참 반가울 것이라는 말로 당신 스스로를 위로하시더라”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4번의 광양방문

공식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살아생전 우리지역을 네 번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신과의 힘겨운 싸움의 서곡을 알리던 72년, 평생의 동지이자 숙적이었던 김영삼 당시 원내총무를 이기고 신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던 그는 처음으로 광양을 방문, 유당공원을 찾아 민주주의 사수를 외쳤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민주주의의 나라에서 군사정권이 득세할 수 없다며 광양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현재 당시 그에게 광양지역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보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지역민 대다수가 그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88년 총선에 광양을 다시 방문해 황색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옥곡 등을 돌며 평민당 불길에 바람을 불러 넣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으로 건설부장관을 지낸 민정당의 김종호 후보를 이돈만 평민당 후보가 만여 표 이상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87년 대선이후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집권실패에 따른 책임을 요구받고 있던 그가 정치적인 부활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선거가 88년 총선이었다. 게다가 민정당은 건설부장관의 경력에다 명망을 얻고 있던 김종호 전 장관을 후보로 지명했다.

광양은 그렇듯 평민당이나 민정당이나 사활을 걸고 매달린 지역이었다. 그런 광양이 김대중을 선택했고 김 전 대통령은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둔 91년 다시 한 번 광양을 방문해 광양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그에 대한 우리지역민의 애정도 대단했다.

대선 때마다 뜨거운 지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김영삼 후보와 갈라져 평민당 후보로 나선 87년 대선에서 우리지역민은 그에게 4만4225표를 던졌다. 당시 투표자수는 5만6천여 명이었다. 여당의 대대적인 선거개입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호남 정치의 아버지이자 민주주의 상징인 그를 선택했다. 노태우 후보는 7천여 표를 얻는데 만족했다.

이후 지역 민심은 갈수록 그에게 기울었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 후보가 된 김영삼 후보와 맞붙은 14대 대선에서 투표자수 7만1477명 가운데 80.2%에 해당하는 5만7333명이 김 전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97년 대선에서는 7만5289명의 투표자 가운데 6만3980명이 그를 지지했다. 지역민의 84%가 그를 선택했다. 그의 당선 소식에 호남이 울었고 호남이 웃었다. 광양도 울고 웃었다. 그는 그렇듯 소외와 탄압의 역사를 짐지고 살아온 지역민의 회한을 가져갔다.

대통령 당선 직후 우리시서 업무보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김 전 대통령은 98년 다시 한 번 광양을 찾았다. 당시 시도지사를 청와대로 불러 업무보고를 받던 관행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김 전 대통령은 직접 시군을 방문해 업무보고를 받는 방식을 취했다. 전남도 업무보고 장소로 목포시가 예견됐다. 여수시도 대통령 방문의사를 적극 나타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선택한 것은 뒤늦게 방문경쟁에 뛰어든 광양이었다. 의외의 선택이었지만 목포와 여수의 업무보고 장소가 2-3층으로 예정됐었던 게 그의 발걸음을 광양으로 옮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김 전 대통령 방문 당시 의전을 담당했던 김성철 문화홍보담당관은 “뒤늦게 우리시에서 대통령을 모셔보자고 나섰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결국 우리시가 업무보고 장소로 선택됐다”며 “대통령님이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목포와 여수시는 업무보고 장소를 2층이나 3층으로 잡았고 우리시는 1층 회의실로 장소를 잡았던 게 우리시를 택한 이유가 됐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그는 “업무보고를 받기 전 김 전 대통령이 20분 정도 휴식을 취하던 옛 직소민원실을 김 전 대통령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돌아가시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우리시를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은 지역민의 건의사항 가운데 한 안건을 그 자리에서 승인했다. 석정사거리와 초남-동광양을 잇는 도로개설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그 약속은 곧바로 지켜졌다.
그렇게 광양과 깊은 인연을 나눴던 김 전 대통령은 이제 영면했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2분의 일이다. 그는 숨지기 직전까지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대한 신념을 지키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 유지를 받드는 일은 이제 국민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