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김대중 대통령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김대중 대통령
  • 한관호
  • 승인 2009.08.20 09:17
  • 호수 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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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이었던가 보다.
일찍 사무실을 나와 운동을 가려고 식당에 들러 김치찌개를 시켰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유성진씨가 풀려났다는 뉴스가 전파를 타고 있었다. 바로 앞좌석에서 60-70대로 보이는 노인 세 분도 유씨 석방 소식을 내 일처럼 좋아라했다. 그렇게 소주를 마시며 흥겨워하던 어르신들 중에 한 분이 ‘봐라, 이명박 대통령은 하나도 안 퍼주고 데리고 안 오나’라고 하자 일행들은 그래그래 하시며 박수를 쳤다.

그러면서 이어진 말 ‘그런데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그것들은 (실제로 그 노인들이 한 말은 차마 글로 옮기기 민망할 정도라 이렇게 표현했다) 돈이랑 쌀이랑 다 퍼주고 말이야. 그것가지고 저놈들이 핵을 만들어 우리를 죽이려한다’라며 언성을 높였다. 듣고 있기 민망하게 사실 왜곡이 과해 은근슬쩍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두 전직 대통령이 소위 막 퍼 준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 마디 건넸다.

하지만 그 분들의 귀에는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소리였던지 그렇거나 말거나 자기들 주장만 해댔다. 혹여 연로하신 분들과 언쟁이라도 생길까 보아 묵묵히 밥 만 먹고 일어섰다. 그래, 옛말에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지 않던가. 병상에 계시는 김 전 대통령은 반드시 쾌차하실 거라고 위안했다.
그런데 오늘 김 전 대통령이 그예 떠나셨다는 황망한 소식이다.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이 떠나신지 불과 87일 만에 한 해에 두 번이나 국상을 치르는 불행을 맞고 있다. 사무실 동료는 그 결기 넘치는 모습으로 세상 불의에 대해 일갈해주셔야 할 어른이 필요한 세상인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두 번의 대선 때 지지활동과 기자로 인터뷰를 했던 인연이 있다.

지난 92년, 그때 마산, 창원 등 경남의 진보진영은 ‘독자후보론’과 ‘비판적 지지입장’으로 갈려 대선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노동문학을 하던 글쟁이 몇 사람도 산호동에 방을 하나 얻어 경남 전역에 배포될 유인물을 작업했다. 시나브로 경찰 미행이 붙어 골목을 한참이나 배회하다 방에 모이곤 했다.
낮에 노동으로 지친 몸, 내리깔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김영삼 후보의 아성인 경남에서 흔히 대중들이 말하는 ‘빨갱이’ 또는 ‘전라도 후보’를 지지한다는 데 마음고생이 더 심했다. 개표가 끝난 후 비통해 하며 술에 취한 선배를 추스르느라 고생했던 기억, 낙선자의 선거운동원이 갖는 씁쓸함만이 남았다. 

그로부터 5년 후, 1997년에는 남해신문 취재부장으로 대선을 맞고 있었다.
남해는 시골이라 대선이라고 특별한 취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각 정당사무소 대표자, 일반 주민 몇 사람에게 듣는 지지 인터뷰, 대표공약 소개나 민감한 사안인 국가보안법 폐지 등에 대한 후보자들의 공약 따위를 비교 분석하는 것 정도였다.
헌데 전국농업인경영인회가 남해 송정해수욕장에서 주최한 수련회에 대선후보들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국에서 농민 수 만 명이 모이니 남해가 아무리 먼 곳이란 한들 그럴 만 했다.

김대중 후보와 수행원들은 원천마을 어느 횟집에서 점심을 하며 휴식 중이었다.
그때 김대중 후보는 강행군에 몸이 불편하셨던지 방바닥에 앉지 않고 지팡이를 짚고 의자에 앉아 계셨다. 한 10여분 정도 남해에 온 소감과 선거에 대해 짧은 인터뷰를 가졌다. 그리고 남해에서 마중 나온 지지자 몇 분의 사진촬영 요청에 응하고는 정작 유세는 못하고 남해를 떠났다.
그해 12월, 처음으로 투표를 한 후보가 당선되는 기쁨을 맛 봤다. 
향년 85세. 일생에 5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오갔고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 모두 3번이나 떨어지면서도  강한 의지와 집념으로 기어코 대통령이 되신 분.

그런 한편 독재정권으로부터 숱한 고문과 투옥, 납치를 당하고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불행한 한국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극복해온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셨다. 정규 대학을 다니지 않았지만 공부하는 정치인이었다. 명예 박사학위 7개, 옥중서신과 대중경제론, 3단계 통일론,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등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필자는 경상도 사람답게(?), 50대답게 ‘전라도 사람들’과 ‘빨갱이’에 세뇌 당하며 자랐다. 그럼에도 돌이켜 보니 나는 그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하여 IMF를 슬기롭게 극복한 지도력,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는 김정일과의 평양 정상회담 등 민족통일을 실천으로 옮긴 햇볕 정책, 기초생활보장제 등의 서민을 위한 정책을 지지했다.

그이는 대통령이 되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전두환을 풀어주라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 건의가 최초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는 박애주의를 신봉하는 그의 종교인 가톨릭의 신념이었지 싶다. 그런 한편으론 평생 몸으로 느꼈던 열악한 한국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를 독립기구로 만들었다. 나아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을 만들어 억울함 죽임을 해원왕생 시키며 불행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정립 시켰다.

봉하에 이어 광주에 빈소가 차려진다. 사람들은 슬픔을 머금고 분향을 할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 시대 어른 한 사람쯤은 있어야 마음 둘 곳 있는데 시절이 이리 스산하니 어찌 살까 신산해 할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그리움이 될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슴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