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민주주의와 민족 화해를 일깨운 당신”
“죽음으로 민주주의와 민족 화해를 일깨운 당신”
  • 최인철
  • 승인 2009.08.27 09:38
  • 호수 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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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시절 후원회 활동으로 만나 우정

 
그는 80년 조국을 떠났다.
핍박 받는 민주주의, 탄압과 속임수로 점철된 조국, 드러내놓고 벌어지는 호남차별이 싫었다. 그리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을 떠난 지 25년 만이다.
그 세월동안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들고 일어났다. 군사정권은 고문과 회유, 협박으로 ‘행동하는 양심’들을 핍박했지만 그럴수록 민초들은 거센 바람에도 쓰러지는 들풀처럼 다시 일어섰다. 조국을 떠나 있는 동안 그는 한 없이 조국이 그리웠다.

밉고 보기 싫어 떠난 조국이었지만 조국의 소식을 날마다 스크랩하고 조국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침내 반민주주의 군부정권에 온 몸으로 저항했던 지도자, 인동초라고 불리었던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 인연이 적지 않았던 그가 조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군사정권 환멸 떠났던 조국

조국,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그를 다시 조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줬다. 미국 생활이 생각처럼 고단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한 없이 넓었다. 부지런히 일한 탓에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재산도 있었고 각종 언론활동을 통해 지역에서도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 삼형제와 알토란 같이 귀여운 손주들이 모두 미국 땅에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두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선 아내부터 반대였다. 여성성이 없던 조국을 떠나 여성이 평등한 미국에서 생활한 그녀가 쉽사리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뜻 조국행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고 싶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한’ 조국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소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2003년의 일이다. 그가 사랑했던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이 물러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주의 10년의 역사를 새로 쓰는 시기였다. 그는 고향인 광양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평생지기 아내와 함께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새삶문화원 강석태 원장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그가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끝내 영면했다는 것이다. 연이어 터진 민주대통령의 죽음 앞에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 “한민족 뿐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 자신의 양심을 실천했던 사람”이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목숨을 희생했던 것처럼 김 전 대통령은 죽어서까지도 조국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화해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고 회고했다.

강석태 원장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김 전 대통령이 92년 대선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숙적이었던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그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던 1980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했다.
조국에서 교직과 관광협회 임원, 감찰위원회(감사원 전신) 위원장 비서 등을 역임했지만 군사정권 하에서 그 같은 직책은 파리 목숨과도 같았다. 노골적인 호남홀대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93년 DJ와 미주 한국인권문제연구소
활동으로 인연

강 원장은 93년 뉴저지 한인회장을 맡고 있었다. 같은 호남사람이라는 인연 탓인지 평소에도 그는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정치와 인생철학에 지지를 보냈지만 직접 그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한국인권연구소를 세웠고 강 원장은 그곳의 이사로 활동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강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은 3단계 통일론과 인권문제 등에 해박한 지식과 혜안을 갖고 있었다. 항상 당장이 아닌 조국의 미래를 바라보는 위치에서 서서 조국의 앞날에 대한 설계를 하는 지도자였다”며 “나이로야 세 살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3백년을 앞선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때 강 원장은 당시 미국 한인회장을 맡고 있던 박지원 의원에게 부탁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대면했다. 그는 “한국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김 전 대통령을 만난다는 사실에 참 기뻤다”며 “글이라도 하나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부탁했더니 웃으면서 글을 써줬다”고 A4 크기의 종이 한 장을 내보였다. 그 위에는 김 전 대통령이 즐겨 쓰고 말하던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친필과 함께 서명이 들어있다. 이 장면은 당시 <말>지 기자였던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에 의해 기록되기도 했다. 강 원장은 지금도 이 글귀를 액자로 보관해 오고 있다.

그는 “평소 마음으로 알고 마음으로 항상 존경해 왔던 사람이어서 대단히 조심스러웠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부드럽고 인정이 넘쳐 별로 대단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며 “소탈한 인상에 형님처럼 대했다”고 전했다.

민주주의 10년, 남겨진 자들의 몫
97년 대선에서 정계복귀를 선언한 뒤 본격적인 김 전 대통령 후원이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 부부도 매년 감사장을 보내왔다. 당시 뉴저지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던 강 원장이 문동환 목사 등과 함께 후원회를 결성했다. 그는 동포의 밤을 개최하는 등 김 전 대통령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다들 이회창 후보가 당선 유력하다고 내다봤지만 결사적으로 김 전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냈다. 먼곳에서라도 조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한인사회의 분위기는 남달랐다. 그리고 그가 지지하던 후보가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
이런 인연으로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식에 그를 초청해 직접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또 당선자의 명의로 그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에게 ‘반세기만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열과 성으로 헌신해온 것을 높이 기린다’며 감사장을 전해오기도 했다. 그런 김 전 대통령은 이제 떠났다.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유지로 남겼다.

강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의 죽음은 매우 애석하다”며 “그러나 그의 죽음이 백성들을 깨우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정권(이명박 정부)을 독재정권이라며 직격탄은 날린 것은 현 시대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며 “많은 고난과 고문 후유증에도 일관성을 지킨 생각과 정책은 인생철학이 없이는 하지 못할 일이다”며 남아있는 정치지도자들의 각성을 주문했다.

강 원장은 “죽음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가는 것은 참 시기적으로 우리민족을 살리고 간 길이다. 이명박이 못한 일을 돌아가신 분이 해냈다”며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만큼 야당과 재야도 하나로 힘을 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민주주의 10년의 역사는 계승돼야 한다. 계승 발전시켜서 생전에 하고자 했던 일을 길이 역사에 남도록 남아있는 사람, 젊은 사람들이 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