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
  • 광양뉴스
  • 승인 2010.01.07 11:09
  • 호수 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 연재를 시작하며
2010년은 경술국치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광양의 매천 황현이 자결 순국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매천은 한말의 문장가요, 시인이며, 애국지사로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비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매천의 삶을 찬찬히 더듬어 보면 곳곳에서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적인 삶의 내음을 맡을 수 있다. 앞으로 25회에 걸쳐 나라가 망해가는 혼돈의 시대에 그가 얼마나 인간답게 살고자 노력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은철 저자 약력

1992년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졸업
1999년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과 석사
2003년 경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6년『광양역사교과서』출판
2010년 현재 광양제철고등학교 근무

1. 매천 황현의 사진과 초상화는 그 자체가 역사
역사 속의 인물을 공부할 때 그 인물의 실제 생김새를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생길 때가 많다.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오노레 드 발자크(Honor de Balzac, 1799 - 1850년)는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며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인물의 외모를 잘 담은 사진 한 장, 내면을 잘 그린 초상화 한 점은 어떤 텍스트보다 그 인물에 대한 많은 진실을 이야기해 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매천을 공부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매천의 삶을 잘 담아낸 사진과 초상화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천의 사진과 초상화를 통하여 그의 삶과 그가 추구한 정신세계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고 초상화를 그린 시기와 작가와 화가가 분명히 밝혀져 있어 우리나라 사진과 초상화의 발달을 이해할 수 있다. 사소하게는 매천이 쓰고 있는 안경을 통해 안경 발달 역사도 밝혀낼 수 있다. 그야말로 매천 황현의 사진과 초상화는 그 자체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공식 인정되어 문화재청은 사진과 초상화를 2006년 12월 보물 1494호로 일괄 지정하였다.

그대, 어찌 평생 가슴속에 불만만 쌓았는가
매천은 삶을 마감하기 직전 해인 1909년, 마지막으로 상경하여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운영하는 서울의 천연당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현재 같은 사진이 두 장 남아 있는데,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한 장에는 종이로 제작된 사진틀의 테두리 오른쪽에 매천 친필로 ‘매천 55세 소영(梅泉五十五歲小影)’이라고 씌어 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또 한 장의 사진  왼쪽에는 매천의 자작시가 2줄로 길게 적혀 있다.

세속의 시류를 따르지 않으려 하니
비분강개에 쌓인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네
독서를 즐겨했지만 홍문관에는 이르지 못했고
유람을 좋아했지만 발해를 건너지 못했네
다만 옛 사람이여, 옛 사람이여 크게 외치니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평생 가슴속에 불만만 쌓았는가

不曾和光混塵   亦非悲歌慷慨   嗜讀書而不能齒文苑   嗜遠遊而不能涉渤海   但然古之人古之人   問汝一生胸中有何

매천의 나이 55세 되던 1909년은 경술국치 1년 전이다. 이때쯤이면 매천은 생을 마감해야겠다는 다짐을 이미 마음속으로 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생전 처음 찍은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니 치열하게 살아온 그 동안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을 테고, 넋두리하듯 자신의 일생을 담은 시를 한 수 읊었을 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살고자 평생 책을 가까이했지만 과거급제를 통해 벼슬살이를 하지도 못했고, 발해를 건너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중국에 가보지도 못했던 아쉬움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평생 가슴속에 불만만 쌓았는가’라는 구절은 비판적 선비로서 한평생을 살았던 회한이 잘 담겨있어 가슴이 찡해진다.

사진 속의 매천은 의자에 앉아 작은 갓에다 두루마기를 입고 오른손에는 부채를 들고 왼손에는 책을 펼치고 있는 약간은 어색하게 연출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사진이 처음 도입된 19세기 말부터 일제 시대에 유행하던 소품을 활용한 전형적인 사진 구도이다.

이 사진에서 매천은 우각 테로 만든 꺾기다리 안경을 쓰고 있다. 그런데 매천의 눈동자를 자세히 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왼쪽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 눈동자는 귀 쪽으로 쏠려 있다.

매천 황현이 순절한 다음해(1911년)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창강 김택영은 황현을 평한 글에서 “황현의 얼굴은 자못 예스럽고 기이하며 눈은 근시에 오른쪽으로 틀어졌고 기가 아주 세서 다른 사람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그를 오활한 선비로 지목하였다.”라고 하였다.

안과 전문의에게 자문을 구해 보니, 매천의 왼쪽 눈은 근시이고, 오른쪽 눈은 어린 시절부터 시력저하로 생기는 감각성 외사시-주시방향이 바깥쪽, 즉 귀쪽임-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사시는 오랫동안 치료되지 않고 방치되면 안구통증, 눈물 흐름 등의 증상이 있다고 하는데, 매천은 나이 오십 전에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요사이는 시력까지 나쁘니 등불을 대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오십도 채 못 되어 이 같으니 어찌 추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사진은 매천이 평생 글만 읽었던 선비였음을, 그래서 결국 외사시 증상으로 고생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상화, 매천의 혼을 살려내다
석지 채용신(1850~1941)이 그린 매천 초상화는 화폭 뒤에 적힌 ‘신해년 오월 상순, 금마에 있는 종2품 정산군수 채용신이 사진을 임모하다’(辛亥五月上澣金馬從二品 行定山郡守 蔡龍臣臨眞)라는 기록을 통해, 1911년 5월 상순에 사진을 보고 그렸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종어진을 그릴 정도로 최고의 초상화가로 인정받은 석지 채용신은 면암 최익현을 비롯한 한말의 독립운동가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중 매천 황현의 초상화는 일급에 속하는 수작이다.

정자관을 쓰고 심의를 입고 화문석 위에 의연하게 앉아 있는 전신좌상인 이 초상화를 보면 매천이 살아온 듯하다. 동그란 안경 너머 빛나는 눈동자와 안면 피부, 투명한 모자, 꼭 다문 입술과 나부낄 듯한 수염, 질감이 넘치는 두루마기의 의문, 부채와 책을 든 손의 모습 등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렸음을 말해 주고 있다. 매천의 문인이었던 김상국은 그의 스승을 면례(緬禮,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례 지냄)한 뒤 「매천선생묘지명」을 지었다. 그 묘지명에 매천의 외모에 대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체구는 작으나 정갈하고, 이마는 넓어 얼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 눈은 틀어진 듯하나 번개치듯 빛나며, 사람을 볼 때 안광이 하늘에 비춰지고 수염은 용과 같이 가볍고 시원스럽게 펼쳐진듯 하였다. 전 판서 최익현이 한 번 보고 그 특이한 인품과 기이한 표정에 감탄하였다”

김상국은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묘지명을 작성할 때 단순히 스승의 외모가 아닌 정신을 기술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채용신이 그린 매천 초상화는 이 묘지명에 표현된 매천의 정신을 너무나 잘 표현하였다.

예로부터 초상화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는 극사실주의 재현 원칙을 충실히 지키면서, ‘전신사조’(傳神寫照,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달함)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겼다.

최근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을 펴낸 조선미 교수는 황현 초상화의 빼어난 이유를 인물의 마음과 정신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동그란 안경 너머 생각에 잠긴 듯 앞쪽을 정시하는 시선과 비통함을 참는 듯 살짝 다문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옷깃을 여미고 숙연한 분위기에 젖게 한다.”고 표현했다.

매천의 사진과 초상화는 위기의 시대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매천의 삶과 꿈을 잘 담고 있었다.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지 못한 회한도 나라 잃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 순국할 수밖에 없었던 절개도 잘 표현하였다. 하지만 사진과 초상화는 삶의 고비 고비에서 인간된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매천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까지는 표현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