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문덕봉 정기 받고 태어나다
백운산 문덕봉 정기 받고 태어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1.14 10:09
  • 호수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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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2>

인걸은 지령이다. 사람은 자기가 사는 땅의 기운을 받는다는 얘기다.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은 백운산의 문덕봉(文德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문덕봉은 문성봉(文星峰) 또는 일자봉(一字峰)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이름이 한 문장하는 인물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1855년 12월 11일(음), 백운산 문덕봉의 정기를 받아, 글하는 올곧은 선비로 살아갈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이가 바로 매천 황현이다.

할아버지의 재력으로 공부하다

매천 황현의 본관은 장수이다.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15대조), 임진왜란 때 충청병사로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황진(10대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황위(8대조) 등이 선조 중 유명한 분이었다.
그러나 황위 이후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농민이나 다름없는 몰락 양반이 되었다. 할아버지 황직 때 와서야 전조(佃租, 소작료)와 화식(貨殖, 이자놀이)으로 거금을 마련하여 가세를 일으킬 수 있었다. 매천이 글하는 선비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반은 바로 할아버지의 재력이었다. 매천은 조부가 돌아가신 후 문권을 정리하면서「왕고수적발(王考手蹟跋)」을 썼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이전에는 세세로 가난하였다. 할아버지가 분발하여 다니면서 저축하여 살림을 모아 십년 만에 재물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이 책은 그 때의 도조와 돈을 받던 장부의 하나다. 자손들은 아직도 그 덕을 보고 있다.…근년에 집안은 영락하여 할아버지의 유업이 남은 것은 얼마 없다…나로 하여금 천 권의 책을 안게 하고 선조의 필기물 자취 뒤에 풀고 농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또한 할아버지의 은덕인 것이다.”
이 글에서 매천은 할아버지께서 살림을 일으키고 그 유산 덕택에 자신이 공부할 수 있었던 은덕에 대하여 불승영모(不勝永慕, 길이 흠모함을 견디지 못함)의 정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 매천의 할아버지는 대대로 이어져 온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천석꾼을 목표로 상업을 업으로 삼아 순천과 광양 사이를 오래 떠돌다 늙어서야 광양 서석마을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칠백석(약 7만 평)의 재산을 모았을 때쯤 장남 흠묵(매천의 큰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매천의 할아버지는 자식과 친척 그리고 이웃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았다.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사람이 매천이었다. 매천이 천여 권의 장서를 쌓아두고 평생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20대에 서울로 유학하며 강호의 인물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30대에 과거시험 초시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할아버지의 재력 덕택이었다. 안타깝게도 매천의 할아버지는 손자 매천이 훌륭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매천이 태어난 다음 해(1856년)에 돌아가셨다. 매천 할아버지의 묘는 석사리 문덕봉 계산 아래에 있다.

매천의 아버지, 황부삼천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 공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매천이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전념할 있었던 배경 중 부모의 교육열을 빼놓을 수 없다. 매천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삼현가사연표(三峴家史年表)』에 의하면, 매천의 아버지 황시묵은 매천의 나이 5세에서 6세 때 구례군 광의면 대전리 상촌(당시 남원)으로, 구례군 토지면 죽안(현 금내리 원내마을) 조부고씨 댁으로 이사를 다니다, 다시 광양 석현(서석마을)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아마 매천의 공부를 위한 ‘황부삼천’이었을 것이다. 매천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40년이 지나 아버지가 남긴 몇 편의 문집을 엮고 나서 발문을 썼다.
“온화한 얼굴 모습과 훤출한 키가 정의에 분개하고 믿음으로 확 트이는 여유로움 속에 어렴풋하게 그리워지는 모습을 날로 잊어짐을 막지 못하겠다. …가만히 생각하면 아버지는 문의 저술에는 옹졸하였으니 전할 만한 것도 없다. 집안일에 초췌하도록 다하고 힘을 외로운 이들에게 다했으니 옛날 애국하던 충신이 어린 임금을 돕는 것처럼 하였다.”
매천의 표현대로 매천의 아버지는 글공부를 많이 하여 학문적으로 성공을 거둔 선비는 아니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도 못했고 이렇다 할 문집도 남기지 못하였다. 다만 선친이 남긴 재산을 관리하는 등 집안일을 하며, 매천의 공부에 전력을 다하였다. 마치 충신이 어린 임금을 모시듯 자식 공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던 것이다.
매천의 아버지가 대단한 교육열을 지닌 온화한 분이었다면, 매천의 어머니 풍천노씨는 남자의 기품을 지닌 굳센 분이었다. 매천의 부모님은 전통적인 부모의 역할을 바꾸어 ‘엄모자부(嚴母慈父)’로서 매천을 키웠던 것 같다. 김택영이 찬한 「성균생원황현전(成均生員黃玹傳)」에 매천의 어머니에 대한 평이 간단히 실려 있다.
“아버지 황시묵은 성품이 강직하여 의리를 숭상했으며, 풍천노씨에게 장가들어 광양 서석촌에서 황현을 낳았다. 노씨는 임신했을 때 태교법을 행하여 비록 고기 한 점이라도 바르게 베어 먹었다. 황현의 총명과 슬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십여 세에 이미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 일찍이 황현의 어머니 노씨가 황현의 사람됨을 알고 남에게 말하기를 ‘우리 아이는 훗날 반드시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하더니 이에 이르러 과연 그대로 맞은 셈이다.”
우리 역사의 영웅들 뒤에는 강단 있는 어머니들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는 사형을 언도받은 안의사에게 “항소하지 말라, 작은 의에 연연치 말고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라고 담담하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매천의 어머니도 아들을 강하고 큰 인물로 키우려고 노력했다.
 매천도 그런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의미 있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순절로 지조를 지킨 매천의 강단은 어머니로부터 대물림된 것이었다.
이은철(광양제철고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