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왕씨 부자를 스승으로 모시다
개성 왕씨 부자를 스승으로 모시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1.21 09:40
  • 호수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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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3>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바보라 불렸던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는 "배우는 일보다 더 당연한 것은 없다"고 했다. 그 당연한 배움을 좋아한 한말의 바보가 매천이다. 평생 글공부만 했던 매천은 어느 날 스승에게 이렇게 탄식했다. “필경 뱃속에 가득찬 5천 권의 책은 참으로 한 글자도 굶주림을 구하지 못하니, 예나 지금이나 같이 탄식할 바입니다. 오직 순리대로 받고 보내면서 내가 할 도리를 할 뿐이겠지요.”

서당에서 또래들을 가르치다.

매천은 어려서부터 왜소하고 병약했지만 총명해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5세 때 하루는 어른들이 안 계신 텅 빈 집에서 온종일 숯으로 창과 벽에 낙서를 하며 글씨 쓰는 흉내를 냈는데 빈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고 전한다. 또 마을에 놀이패가 들어와 사람들이 모두 나가 구경하는데도 나가지 않고 홀로 남아 독서를 했다.

7세 때부터는 집에서 수리의 거리에 있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천의 부모는 서당으로 가는 길에 송림이 있어 맹수의 피해를 걱정, 밤에는 다니지 못하게 했으나, 매천은 몰래 가서 책을 읽다 돌아오곤 했다. 매천은 서당에서 문리를 빨리 터득해 선생을 대신, 능히 같은 또래의 학동들을 가르쳤다. 즉『사략(史略)』을 읽을 때는『통감(通鑑)』을 가르쳤고,『통감』을 읽을 때는『맹자』를 가르쳤고, 『맹자』를 읽을 때는 가르치지 못하는 책이 없었다.

죽순은 서로 높아지려는 생각이 있고 筍有相高意
파초는 아직 마음속을 다 못 펼쳤네 芭多未展心1)

이 시는 어린 시절 매천과 함께 서당에 다녔다는 광양 석사리의 송우정씨가 외워 그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봄비가 온 뒤에 죽순이 서로 경쟁하듯 자라는 모습과 파초의 넓은 잎이 말려서 펴지지 못한 것을 비유한 대구를 잘 이룬 시다. 자연을 관찰하여 의인화해 표현한 기법이 아주 세련됐다. 10살도 안 된 어린 매천이 지은 시가 이 수준이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11세 되던 해 하루는 마을 어른을 따라 잔치에 갔다가 ‘기러기 소리, 노는 사람들 자리에 먼저 떨어지네(雁聲初落遊人席)’란 시구를 지었다. 날아가는 기러기가 우짖는 소리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듣기 어려우나, 한가하게 노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먼저 들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잔치에서 하릴없이 노는 어른들을 은근히 비꼬는 시를 어린 매천이 지었던 것이다. 매천은 애어른이었다.

개성 왕씨 부자를 사사하다

매천은 11세에 스승을 찾아 구례로 갔다. 구례 광의면 지천리 천변마을은 구례의 명문가 개성 왕 씨의 세거지인데 그곳에는 호남의 대학자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 1816~1868)가 칩거중이었다. 그의 선조 왕득인(王得仁, 1556~1597)은 정유재란 당시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7의사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왕석보는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갔다가 과거 수험생들이 청탁을 일삼는 것을 보고 비루하게 여겨 과거를 포기했다. 이후 ‘탄환만한 작은 고을’ 구례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했으나, 시에 뛰어나 백광훈(1537~1582)과 임제(1549~1587) 이후 호남시단을 새로 연 시인으로 추앙받았다. 매천은 왕석보와 그의 장남 사각(師覺, 1836~1895) 부자를 사사했고, 사각의 동생들인 사천(師天, 1842~1906), 사찬(師瓚, 1846~1912)과는 평생 문우의 관계를 맺었다.

이들 개성 왕씨 4부자는 모두 시에 뛰어나고 지조 있는 선비였다. 창강 김택영은 4부자의 공동시집 『개성가고(開城家稿)』를 출판, 그 서문에서 “네 군자는 모두 재간이 있으면서 세상에 버림받아 마음이 울적한 인물들이다”라고 했다. 매천은 4부자 모두 출중한 학문과 명사와의 폭넓은 교류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세상에 쓰이지 못한 점을 애석해 하면서도, 결국 본인도 스승의 길을 따라갔다. 매천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벼슬길을 포기한 것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왕석보의 제자로는 나철(羅喆, 1863∼1916)과 이기(李沂, 1848~1909)가 유명하다. 두 사람은 함께 5적 암살을 시도했으며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를 창시하는데 참여했다. 이기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절식 끝에 숨졌으며, 나철은 일제의 민족 종교 탄압에 맞서 자결로써 저항했다. 모두들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한편 매천과 왕씨 일가와의 끈끈한 인연은 스승과 제자의 역할을 바꾸어 가며 대를 이어 지속됐다.

광양의 황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다

조선시대 선비의 기본은 시와 문장을 짓는 것이다. 매천은 특히 감칠 맛 나는 시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매천은 스승 왕석보에게 시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변 인사들을 놀라게 했다.

연꽃은 고기와 친구 되어 한 연못에서 노닐고 蓮爲魚隊會同池
버들과 꾀꼬리는 오래 전 같은 고향에서 살았네 柳是鶯兒生長鄕

14세(1868) 때 처음으로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응시했다. 매천의 붓 끝에 바람이 일자 이를 보던 여러 선비들이 광양에 신동이 났다고 탄복했다. 이후 호남좌우의 향시를 휩쓸고 다녀 거리의 아이들까지도 광양 황신동을 알아볼 정도였다. 어느 날 호남 장성의 유학자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매천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써 주었다. 천재 소년에 대한 노학자의 기대와 염려가 함께 담겨 있다.

대단한 보배가 행전도 없이 찾아오니 至寶來無脛
놀랍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一驚?一憂
쉽게 얻은 것은 잃기도 쉬운 거니 易得或輕失
청컨대 연잎 위의 이슬을 보라 請看荷上珠

17세에는 순천영에서 백일장을 실시했을 때 영장 윤명신이 의관을 벗고 황현을 맞자 “내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선비인데 그대의 무례는 어찌 이 같은가”하고 따지니, 영장이 의관을 갖춰 사과했다. 한번은 처남이 향시에 응시하기 위해 매천에게 문장을 대신 지어줄 것을 몇 차례 부탁하자 “자기 실력으로 해야지”하고 끝까지 거절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존을 지키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칼 같은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매천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매천은 신동으로 태어나 훌륭한 스승 왕씨 부자를 사사하면서 호남 최고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 시골에 갇혀 있는 ‘책만 보는 바보’에 지나지 않았다. 매천에게는 시골에서 공부한 것을 중앙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결코 녹록치 않은 과정이 남아 있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천리 길을 달려 한양으로 달려간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은철(광양제철고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