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광양 촌닭, 한양으로 가다.
4. 광양 촌닭, 한양으로 가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1.28 09:45
  • 호수 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

매천 황현 순국 100년 기획 연재

사람은 만남을 통해서 성장한다. 어떤 시기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특히 한평생 살아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은 벗과의 만남이다.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 벗을 보라고 했다. 매천이 상경해서 신교(神交, 정신적 사귐)를 나눈 벗들을 보면 분명 매천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양으로 간 광양 촌닭 매천은 어떤 고고한 선비들을 벗으로 만났을까?

강위 선생을 어떻게 연모해야 할까

매천은 10대에 구례로 유학 가서 주로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결과 지방 향시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그의 명성은 20대가 되기 전에 호남 전역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틀에 박힌 과거 공부보다는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고루한 시골을 벗어나 한양으로 가고 싶었다.

1876년, 때마침 광양의 석현정사를 방문한 경남 하동의 성혜영으로부터 중앙시단의 동향을 듣고, 그의 스승이자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추금 강위(姜瑋, 1820~1884)를 소개 받았다. 강위는 한미한 무반 가문 출신으로 과거에의 뜻을 버리고, ‘남다름’의 삶을 지향한 인물이었다.

1878년 여름, 매천은 강위를 만나러 상경하였다. 매천은 이때의 감격을 “나는 아직 선생을 뵙지 못했지만, 일찍이 뵌 것처럼 생각되네. 한 번 뵙고 난 후를 예상해 보면, 마땅히 어떻게 연모해야 할까”라고 읊고 있다. 한양에 도착한 매천은 드디어 수소문 끝에 강위를 만났다. 매천은 24세, 강위는 59세였다. 세대를 뛰어넘은 만남이었다.

매천은 두 달 가량 서울에 머무르며, 강위의 소개로 명사들을 만났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신헌(申櫶, 1810~1888) ? 신정희(申正熙, 1833~1895) 부자였다. 이들 부자의 집에 머무를 때 한번은 신헌이 매천에게 바둑을 청하자 “대감은 바둑을 잘 무르신다니 두지 않겠습니다.”라 말하였다. 위당이 “자네에겐 결코 무르지 않겠네.”라 하여 대국하자 매천이 연전연승했다는 일화가 있다. 남의 집에 기숙하고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기는, 매천의 꼬장꼬장한 성품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처음으로 상경한 매천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국으로 가는 사절단을 수행하여 이미 여러 번 북경을 다녀온 바 있는 강위,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책임자였던 신헌 등을 만나면서 당시의 시대 상황과 국제 정세를 바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1880년 강위가 2차 수신사 김홍집의 서기로 일본에 갈 때, 매천은 부산 동래까지 가서 강위를 전송하며 <추금노인 강위가 일본에 가는 것을 봉송함(奉送姜秋琴老人瑋赴日本)>이란 시를 써서 그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창강 김택영과 신교를 나누다

1880년, 매천은 장자 암현을 낳은 그해, 2년 만에 다시 상경하였다. 이번에는 후대에 ‘조선의 마지막 문장’으로 불리게 될, 당대 최고의 문장가 영재 이건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침 이건창이 귀양 가기 전 근신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매천은 금강산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출발하려고 하는 날 “비를 만나 출발을 못하고 쉬면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어(値雨不發有懷)” 이를 시로 표현하였다. 그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 만권의 책을 읽었으니 旣已破萬卷
또한 사방으로 돌아다닐 만하네 亦可橫四方

26세의 나이에 이미 ‘만 권의 책을 읽은(讀萬券書)’ 당당함으로 이제 ‘만 리의 길을 걸어(行萬里路)’ 가슴 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매천은 30여 일에 걸친 금강산 유람을 <담풍췌묵(談楓贅墨)>이라는 여행기로 남겼다. 금강산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창강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을 만나기 위해 개성으로 향하였다.

한편 2년 전 매천이 강위를 만나려고 상경하였을 때, 김택영은 지리산 일대를 여행하던 중 강위에게서 소개받은 구례 천변마을 왕사천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왕사천이 김택영을 매천의 종형 황담의 집으로 안내하여, 황담이 소장하고 있던 매천시를 읽었다. 이런 일을 두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할까. 매천은 강위를 만나러 가고, 강위의 소개가 인연이 되어 김택영은 매천의 시를 읽고, 이렇게 두 사람은 돌고 돌아서 마침내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매천이 먼저 세상을 뜰 때까지 30년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었으며, 매천 사후에는 창강의 일방적 짝사랑으로 지속되었다. 김택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 이미 망국을 예상하고 중국 회남으로 망명을 갔다. 그곳에서 출판 계통의 일을 하던 그는 매천의 유고를 정리하여 <매천집>을 간행하였다. 지금 우리가 매천의 유고를 볼 수 있는 것은 황현과 김택영, 두 사람의 우정이 꽃 피운 결과이다.

시를 폐백 삼아 이건창을 만나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은 소론계 강화학파에 속하는 인물로 매천보다는 세 살 위였다. 그는 조선왕조에서 최연소 기록을 두 개나 세웠다. 15세에 최연소로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19세에는 최연소로 벼슬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곧은 성격 탓으로 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26세 때 충청도 암행어사로 부임했을 때에는 당대의 실세였던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을 기어코 탄핵했다. 그 결과 머나먼 벽동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건창의 이러한 곧은 처세는 매천과의 만남을 꼬이게 만들었다. 매천이 1880년 처음 이건창을 찾아갔을 때, 그는 권세가들의 공격을 받아 문을 닫아걸고 인사를 사양했고, 곧 귀양을
이건창의 생가, 강화도 화도읍 사기리에 있다.
 가 만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것은 이건창의 <송황운경서(送黃雲卿書)>에 자세히 볼 수 있다.


명미당 현판, 대청마루 안쪽에 명미당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처음 운경(매천의 자)이 시골에서 공부하면서 고루하고 과문한 것을 걱정했는데 사람들이 태학에는 선비가 많다고 하니 얻을 것이 있겠구나 하는 기쁜 마음으로 도보로 오백 리 길을 올라 왔다. 막상 상경했으나 찾아 갈 곳이 없는데 어떤 이가 운경에게 나를 얘기해 주니 곧 시를 폐백 삼아 나를 찾아왔다. … 다음 해에 귀양에서 돌아오게 되어 운경이 매우 기뻐하며 다시 시문을 가지고 오니 기쁘기가 예전부터 친한 사이 같았다.”


명미당은 이건창의 당호이다. 단아하면서도 힘있는 매천 황현의 친필 글씨이다.
두 사람은 다음 해 이건창이 귀양에서 돌아오면서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했다. 광양 촌닭 매천이 중앙 무대에서 인정을 받게 된 필요 조건은 그의 재능이었지만, 이건창의 인정은 충분 조건이었다. 그리고 필요 충분 조건은 망년지교(忘年之交)의 우정이었다. 이건창은 임종 직전에도 매천을 몹시 그리워하여 “매천을 한 번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하며 숨을 거두었고, 매천은 강화도로 천리 길을 달려가서 이건창을 조문하였다.

매천이 20대에 상경하여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나눈 사람들은 무반 가문의 강위, 중인 출신의 김택영, 소론 가문의 이건창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주류이다. 매천이 중앙에서 교유한 사람들은 당대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였다. 하지만 시답잖은 비주류가 아닌 주류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비주류였다. 매천은 권력을 좇아 자존심을 굽히기 보다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자신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지조 있는 비주류들만 사귀었다.

이은철(광양제철고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