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자랑하는 반머저리가 되다
자식 자랑하는 반머저리가 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2.04 10:44
  • 호수 3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5)

매천 황현
옛말에 ‘여편네 자랑은 온머저리, 자식 자랑은 반머저리’란 말이 있다. 특히 남존여비의 조선시대에 마누라 자랑하는 가부장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온머저리였을 것이다.

그 보다는 좀 낫지만 자식 자랑하는 부모도 반머저리로 취급되었다. 남의 자식 고운 데 없고 내 자식 미운 데 없어 제 자식의 흉은 모르는 게 우리네 보통 어리보기들이다. 매천도 자식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모양이다.

장남의 자(字)를 짓다

1871년, 매천은 나이 17세 되던 해에 구례군 마산면 상사리에 사는 해주 오씨의 딸과 결혼하였다. 19세에 낳은 첫 딸도, 이어서 태어난 두 아들도 모두 일찍 죽었다. 자녀 셋을 내리 잃은 부모의 심정이란 어땠을까.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다 묻고,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황암현
평생 가슴 한켠에 한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이후에 태어난 2남 1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매천 26세 때 낳은 넷째 아들이 사실상의 장남이었으며,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연아이었다.
황암현(1880~1946), 아명은 연아였으며, 암현은 아버지 황현이 지어준 관명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너무 닮아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한다.

매천 황현(1855~1910), 매천이 순국하기 1년전 1909년에 서울의 천연당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얼굴 부분만 확대한 것이다.

매천의 장남 연아에 대한 기대는 각별하였던 것 같다. 연아가 20살이 되던 해를 기념하여 관명, 즉 자(字)를 암현(巖顯)이라 직접 지어주었다. 중국 은나라 고종 때 부암에 살았던 평범한 농부 부열이 훌륭한 재상이 되었다는 고사의 ‘암’자와 항렬의 ‘현’자를 딴 것이다. 매천은 ‘자암현설(字巖顯說)’이란 글을 지어 장남의 자를 암현이라 짓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고종은 부모의 치상을 정성스레 치른 삼년 만에 언행을 조심하고 있는 터에 꿈속에서  천제께서 주는 훌륭한 신하를 그림으로 받아 그 그림 같은 사람을 찾고 보니 부암에서 농사짓고 있는 부열이었다. 고종은 이 부열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부열에게 덕을 위하여 선왕인 탕왕의 유훈을 따르게 하라 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비유되었다. 숫돌 역할을 해달라는 것, 누룩의 역할을 해 달라는 것, 그리고 소금과 매실이 되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매천은 장남 연아가 숫돌 ·누룩· 소금·매실과 같은 세상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하며 암현이란 자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도 큰 법이다. 아버지 매천이 기대하는 만큼 아들 암현은 삶에 대한 확실한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매천 부자, 한 스승을 사사하다

매천은 장남 암현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암현은 바탕이 무디고 둔하였는데 내가 글을 준지 십 년이 지나도록 날로 더욱 게으르니, 내가 생각하건대 그가 어려서 잠깐도 여러 농사 일로 돌아가지 않았음과 같다. 독서에 게으름은 곧 농사에 게으름과 같은 것이다.”1) 매천은 장남이 농사에 부지런하여 부모를 잘 공양하고, 독서에 부지런하여서 입신양명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장남 암현은 매천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매천 본인이 직접 자식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공자도 “군자는 아들을 직접 가르치는 법이 아니다”고 하면서 아들을 다른 선생에게 배우도록 했다. 매천도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자신의 장남은 본인의 스승이었던 봉주 왕사각에게 맡겼다.

영재를 교육하는 것은 엄연히 군자의 삼락에 들어 있으니, 모든 일은 괴로운 가운데 혹 보람 있는 일이 있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며 30년을 모신 스승에게 자식을 부탁하며 편지를 보냈다.

“저의 자식에게 가서 뵙도록 명한 것은 부득이해서입니다. 그가 사람됨이 기민하나 놀기를 좋아하고 그 바탕이 겉으로는 둔한 것 같으나 실은 영리한 편이어서 자상하게 손질하면 뽑아 낼만한 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책의 어렵고 쉬움을 참작하여 3, 4, 5줄 정도를 날마다 읽히고, 일과의 양이 비록 적다고 하더라도 날을 빼거나 쉬는 일이 없게 한다면 참으로 어린이를 가르치는 긴요한 법이 될 것입니다.”

 이 편지글 중 은근히 아들을 자랑하는 부분에서는 팔불출 아버지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스승에게 자식 교육시키는 구체적 방법까지 훈수하고 있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매천으로 하여금 스승에 대한 예를 어기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자식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부모의 애잔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매천이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격대교육의 진수를 보여주다

원래 아들보다 두벌자식이 더 곱다고 한다. 매천의 손자 사랑도 대단하였다. 1903년 매천 49세 때, 장남 암현의 아들 인주의 돌잔치를 열었다. 집안과 온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양고기와 술로 축하 잔치를 열고 기쁨에 겨워 손자를 무릎에 안고 기뻐하며 시를 한 수 지었다.

그 일부를 옮겨 보면, 고관을 부러워하지 말고 가난도 싫어하지 말며 (不慕高官不厭貧) 낙원을 거닐며 자연 그대로의 참됨을 유지하라 (逍遙樂國天眞) 틀림없이 네게 천 권의 책을 주리니 (丁寧付與書千卷)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식인이라고 일컬어져라 (世世人稱識字人)매천은 손자에게 돈 모아 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글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매천 자신이 할아버지 덕택에 천 권의 서적을 쌓아 놓고 공부하였던 것처럼, 손자에게 그 혜택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은 바람이 잘 담겨있는 시이다. 앞서 아들을 교육시킬 때에 비하면 상당한 여유가 느껴진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고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