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한번 웃음은 천금과 맞먹는다
부모님의 한번 웃음은 천금과 맞먹는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2.25 09:46
  • 호수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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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7)

생원시 1등 교지
 
 조선시대에 지배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요구되었다. 좋은 혈통·뛰어난 학문 ·과거 합격·관직 진출이었다. 그런데 족벌정치와 매관매직이 판을 치던 조선후기에는 이 네 가지 조건에 ‘돈과 빽’이 첨가되었다.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이 빠진 동그라미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매천은 오로지 학문적 능력밖에 없었으니 지배 엘리트가 되기에는 애당초 힘든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매천은 평생 책보고 글쓰기만 하기로 작정하고 만수동에 은둔하였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고집 센 매천도 이길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식년 생원시에 1등으로 입격하다.

서른 이후 매천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고금서적의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속이 탄 매천의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고 못하는 것은 운수에 있는 것이다. 내 생전에는 과거를 폐하지 말고, 내가 죽은 후에는 네 마음대로 하라”라고 아들을 책망하였다. 예순을 바라보는 부친의 마지막 소원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황소고집 매천도. 교지, “유학황현생원1등제2인입격자, 광서14년3월”이라 적혀 있다. 광서는 청 덕종의 연호로 광서 14년은 1888년에 해당된다.

1888년, 34세의 매천은 마지못해 식년 소과 생원시에 다시 응시하였다. 지난번 보거급제시에서는 시관 한장석의 농간으로 떨어졌었다. 다행히 이번 시관은 정범조(鄭範朝, 1833~1898)가 맡았는데, 그의 8촌 아우인 정만조(鄭萬朝, 1858~1936)가 이건창을 통해 매천의 재주가 특별한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만조는 정범조에게 “황현이 이번 과거에 일등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이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정범조가 그 말대로 일등으로 선발하니 두 번째 응시해서 비로소 입격한 것이다.

5년 전 보거급제시에 응시했을 때와 다른 점은 매천 실력의 향상보다는 시관과의 관계였다. 그 때는 시관 한장석과 생면부지의 관계였던 데 비해, 이번에는 정만조를 통하여 시관 정범조가 이미 매천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매천의 학문적 능력에다 소위 말하는 ‘빽’이 작용하여 입격한 것이었다. 물론 매천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천이 응시한 식년 소과 생원시에서는 1등 5명, 2등 23명, 3등 186명, 총 214명이 입격하였다. 이때 매천이 받은 교지를 보면, “유학 황현 생원 1등 제2인 입격자, 광서 14년 3월”이라 적혀 있다. 유학은 관직이 없음을 의미하고, 광서는 청 덕종의 연호로 광서 14년은 1888년에 해당된다. 매천은 1등 5명 중에서 두 번째로 입격하였던 것이다. 보통 매천이 생원시에 장원하였다고 회자되어 왔는데 사실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아무튼 이제 늙은 부모님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렸다는 기쁜 마음으로 생원 입격을 자축하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서생의 두더지 같은 배로 강물 깊음을 깨달았고 書生腹覺河深 돌아보면 웃음 나오는 건 부질없는 걱정이어라 還笑從前枉費心 고향에서 기쁜 소식 들을 걸 멀리서 생각하니 遙想鄕園聞喜日 부모님의 한 번 웃음 천금과 맞먹으리라 爺孃一笑抵千金

사실 매천이 과거에 다시 응시한 것은 본인의 출세에 대한 욕구보다 부모님에 대한 마지막 효의 의미가 더 컸다. 아들의 생원시 1등 입격 소식을 고향에서 듣고 부모님이 크게 웃으시는 모습을 천금에 비유하고 있는 대목은 매천의 효심이 어느 정도로 깊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생원이 된다는 것은?

매천이 34살의 나이에 겨우 생원시에 1등 2인자가 되고 대과는 응시조차 않고 낙향했다고 실망하는 분이 계실까해서 사족을 달고자 한다. 조선 시대에 생원 진사가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생원 진사는 문과 합격자와는 달리 관직으로의 진출이 보장되지는 않았지만 국가로부터 사족으로의 지위를 공인받은 신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12대 동안 만석을 한 조선의 명문가 경주 최부잣집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생원 진사는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증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생원 진사 이상의 진짜 벼슬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당쟁이 심했던 조선에서는 벼슬이 높아지면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멸문지화를 당하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생원 진사시에 입격한 자들의 명부를 사마방목이라 한다. 과거가 처음 실시된 1393년부터 폐지되는 1894년까지 502년간 설행된 생원 진사시 총 230회 중 186회분의 사마방목이 전해지고 있는데, 수록된 인원은 40,649명이다. 이 중 거주지가 기재된 38,386명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이 전체 인원의 14,388명(37.48%)를 차지하여 가장 많은 수를 배출하였으며, 안동은 783명(2.04%)으로 2등을 차지하였다. 매천과 관련된 남원은 389명(1.01%), 순천은 39명(0.10%), 구례는 32명(0.08%), 광양은 겨우 17명(0.04%)이다.

예나 지금이나 ‘개천에서 용 나기’가 얼마나 힘든 지, 왜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낸다.’는 말이 생겼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치이다. 물론 조선 후기에 과거가 매매되면서 ‘마을마다 급제자요, 집집마다 진사’가 나오는 실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방 출신이 생원 진사가 되기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낙향하다

조선시대 생원 진사의 평균 입격 연령은 34.5세이다. 특히 19세기 후반이 되면 37.8세로 더욱 늦어지는데, 그만큼 생원 진사시의 입격을 위해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매천은 34세라는 지극히 평균적인 나이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매천의 문인이었던 김상국의「매천선생 묘지명」에는, “이 당시 당파와 족벌 정치로 인한 화(禍)와 매관매직의 기풍까지 겸하여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상태이므로 이에 돌아와 구례군 백운산 남쪽 골짜기에 은거하며 저술과 후진 교육으로 그 도를 행하였다.”고 진술되어 있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고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