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안실, 세 칸의 초옥을 마련하다
구안실, 세 칸의 초옥을 마련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3.04 10:00
  • 호수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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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은 서재였다. 선비에게 서재는 독서하며 사색하는 공간이었고, 벗과 어울리며 소통하는 공간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공간이었다.  결국 서재는 선비의 표징이었다. 그래서 선비들은 자신을 닮은 서재를 짓고, 삶과 마음을 담아 서재 이름을 지었다. 조선 중기의 재야학자였던 이협은 띠풀로 엮은 움막을 짓고, 선비는 출세나 부귀영화를 좇아서는 안 되며 ‘졸렬함(拙)’을 길러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로 ‘양졸당(養拙堂)’이라 이름하기도 하였다. 백운산 뒷자락의 궁벽한 만수동에 칩거한 매천은 어떤 서재를 짓고, 서재 이름에 어떤 삶과 마음을 담았을까?

세 칸 초옥 서재를 마련하다

성균관 유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낙향한 매천은, 1890년 36세의 나이가 되어서 만수동에 자신의 서재를 처음으로 지었다. 매천은 귀 옆머리 땋았을 때부터 유학하여 집에서 생활하지 않았고 또한 가난해서 제대로 된 서재를 갖추지도 못하였었다. 그런데 만수동에 칩거하면서부터는 지세가 궁벽하여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아이는 날로 자라나는데 공부할 자리가 없는 것이 근심이었다. 이에 문 앞의 메마른 자갈밭 빈 땅에 서재를 한 채 지었다. 매천은 자신의 서재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터는 담도 안하고 나무도 가꾸지 않고 돌도 옮기지 않았다. 그 재료는 기둥할 것을 들보로 하고 서까래 할 것을 기둥으로 하고 도끼자루만한 것을 가지고 서까래를 하기도 하였다. 대를 쪼개서 창문을 만들었으며 겸하여 평상으로도 하였다. 산이 깊어 띠는 넉넉하여 두껍게 이어 저쪽 기슭에서 바라보면 정사(精舍) 같기도 하였다. 집이 겨우 세 칸이 마련되었는데 둘로 나누어 종들이 각각 불을 때고 거처하게 하였다. 나머지의 동쪽은 독서하는 방으로 삼았으니 대개 심히 좁고 누추하여서 서실이라고 일컫는 것과는 같을 수 없었다.
부실한 목재로 대충 얽어서 골격을 만들고 띠를 엮어 지붕을 덮은 세 칸의 초옥이었다. 그것도 두 칸은 종들이 거처하고 나머지 한 칸을 서실로 사용하는 옹색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매천은 그 협소하고 누추한 것을 잊어버리고 만족함이 있었기 때문에, 선비정신이 녹아있는 세 칸 초옥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재 이름도 ‘구차하지만 그런대로 편안히 지낼만하다’는 의미를 담아 ‘구안실(苟安室)’이라 지었다.『논어(論語)』「학이(學而)」편의 ‘거처하는 데 편안함을 찾지 아니한다.(居無求安)’와 「자로(子路)」편의 ‘그런대로 이만하면 갖추어졌다(苟完)’ ‘그런대로 이만하면 아름답다(苟美)’에서 따왔다.

매천은 이 구안실에 지기지우(知己之友)였던 이건창의 글씨를 걸어 놓고 1902년 광의면 수월리 월곡 마을로 이사할 때까지 12년 동안 기거하였다.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우인(友人)들과 교유하였고, 많은 시들을 창작하였고,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천 권의 책을 끼고 삼여를 즐기다

매천의 문인 숫자는 대략 50여 명에 이른다. 동생 황원과 아들 암현을 비롯하여 윤종균, 허규, 박창현, 왕수환, 이병호, 오병희 등 20대~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시를 배웠으며, 당시 이들이 매천을 중심으로 ‘황매천시사’를 구성하였다고 이건창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들 제자들이 모두 매천의 마음에 쏙 든 것은 아니었다. 1895년 9월 23일, 매천 41세 때 구례 광의면 지천리에 살고 있던 수제자 권봉수(1872~1940)에게 보낸 편지글을 보면,

구안실의 제자들은 모두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에 얽힌 바 되어서 한 사람도 따르는 사람이 없고, 다만 부자(父子)만이 서로 대하여 종일토록 쓸쓸하니 자못 견디기 어렵네. 해는 점점 저물어 가는데 삼여지락(三餘之樂)을 약속대로 실천할 수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스승의 눈에 비친 제자들은 대부분 게으르다. 구안실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민망스러워하며 가장 아끼는 제자 권봉수에게 한탄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면서 제자에게 삼여지락, 즉 독서하기 좋은 세 가지 여가를 얘기하고 있다. 겨울은 한 해의 여가이고, 밤은 하루의 여가이고, 비오는 날은 한 때의 여가임을 강조하고, 제자가 그 여가를 알뜰히 가꾸기를 당부하고 있다.

매천은 1896년(42세) 한 해 동안 구안실에서 쓴 시 185수를 모아 『구안실신고(苟安室新稿)』를 펴내기도 하였다. 매천의 대부분의 시가 사회비판적이고 애국적인 내용인 데 비해 이 시집에 실린 시는 서정시가 주를 이룬다. 즉 다른 작품들에서 보이는 비분강개한 이미지와 달리 풍부한 감수성과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매천이 이 시기에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평온하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산들바람이 책 향기 일으키며 가늘게 불어오는 1897년 4월에 전북 김제 출생의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이 매천을 찾아 만수동 구안실로 왔다. 이정직이 “산중에서 천 권의 책 끼고 앉아서, 늙어서도 삼여(三餘)를 아끼는구나.”라고 노래하니, 매천은 “스무 날이나 아이들 글 가르치기 폐하고, 삼 년 만에 오래 그리던 그대를 만났네.”라고 대답하였다. 두 사람은 삼 년 만에 만나 지음(知音)의 다정함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을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8>
귀신 나라의 미치광이 되기를 거부하다

매천은 구안실 옆에 삿갓 모양의 1칸 정자를 지어 ‘일립정(一笠亭)’이라 하고, 여름에 더위를 피하며 잠심문적(潛心文籍)하고 있었다. 1898년에 성균관 박사시가 열렸다. 구례 군수  박항래가 매천에게 성균관 박사시에 나아갈 것을 권하자, 매천은 “나는 탕건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라고 대답하며 불응하였다. 탕건은 말총으로 만든 당시의 관모였다. 매천은 세상의 그릇됨을 꿰뚫어 보고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문장가요, 대관이었던 신기선 ·이도재 등이 교제하기를 원하였으나 이도 단호히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었다.
서울에서 같이 사귀던 친우들은 속히 서울로 올라와 다시 글도 짓고 벼슬도 하면서 시국담을 논의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런 권유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귀신같은 나라의 미친 놈 족속들 틈에 들어가 같이 미치광이가 되게 하려는가?”라고 오히려 친우들을 책망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정계에 나가지 않는다는 유교적인 군자상을 지키고자 하였다.

매천은 자신의 서재인 구안실을 정말 사랑하였다. 사립문 만들고도 잠그지 않고 멀리서 찾아오는 벗들과 시를 나누고, 구안실 주변의 자연과 교감하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지족(知足)의 삶을 가꾸어 나갔다.<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고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