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매천, 유교의 눈으로 동학농민운동을 보다
11. 매천, 유교의 눈으로 동학농민운동을 보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3.18 09:50
  • 호수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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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 순국 100년 기획 연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

19세기 말은 ‘민란의 시대’였다. 세도정치의 부패가 극에 달했던 임술년(1862년), 진주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농민 봉기가 진압된 이후에도 농민들의 항쟁은 지속되고 있었다. 결국 갑오년(1894년)에는 조선왕조 최대의 변혁 운동인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하였다. 죽창 들고 일어선 동학과 농민들의 저항은 당시의 위정자들에게도, 매천 개인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매천은 그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를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대로 기록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생각하였다. 매천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오하기문』,『동비기략』,『매천야록』등의 저서가 집필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때부터이다.

동학은 백성을 선동하는 요술이다

매천이 남긴 역사서 중『오하기문(梧下記聞)』은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통사의 성격을 지니는 최초의 책이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동학농민운동의 발생이 “오호라! 재앙과 변괴의 일어남이 어찌 우연이랴! …… 오랫동안 누적된 추세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조성된 것은 아니다”라고 필연이었음을 밝히면서,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충청지방은 본래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훈신과 척신 그리고 지방 수령을 지낸 사람들이 숲을 이루듯이 즐비했고 또한 파당을 형성하여 그들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농가를 사들이고 강제로 묘지를 빼앗기도 하였다. 가난한 서민들은 이들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쳐 동학이 일어나자 팔을 걷어붙이고 호응한 사람들의 숫자가 백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매천은 동학농민운동을 당시 지배층의 백성에 대한 지나친 수탈이 원인이 되어 동학과 농민이 결합하여 일어난 봉기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봉기의 필연성은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천은 동학에 대하여 학정에 시달리는 백성을 선동한 요술로 보았으며, ‘실상은 상스럽고 얄팍한 서학(천주학)의 부스러기를 주워 모은’ 사교(邪敎)라고 평가하였다.『매천야록』에 의하면 동학은,

처음에 최복술(일명 제우)이 처형된 후 그의 조카 최시형이 충청도 보은의 산중에 숨어살면서 요술(妖術)을 몰래 전파하였는데, 이를 ‘동학’이라 하였다. 그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세상에 장차 큰 난리가 일어나므로 동학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진인이 출현하여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는데 장수와 재상 등의 공신들은 모두 동학교도들이다.”라고 하면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선동하였다. 바야흐로 백성들은 학정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결국 그들과 호응하여 전라도와 충청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매천은 동학처럼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자 하는 공부는 군자가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며, 옛것을 미루어 운세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뜻만 넓어 기이한 내용을 몇 마디 말로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이라고 보았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였던 전봉준은 ‘요사한 지식에 미혹되어 늘 울분에 차 있는’ 인물로, 김개남은 ‘성격이 포악하고 미친 듯한 행동과 잔인함이 여러 적들 가운데 가장 심한’ 인물로 아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해서 매천은 동학을 믿는 자들을 동비(東匪) ? 비도(匪徒) ? 토비(土匪) ? 비적(匪類) ? 적(賊) 등도 모자라 심지어는 융(戎, 오랑캐)으로 표현하였다. 동학의 지도자는 당연히 동비적괴(東匪賊魁)로 취급하였다.

이처럼 매천이 동학농민운동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였다. 매천은 조선의 신분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학교도들은 불평등한 신분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물리적인 힘의 행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동학에) 입도하는 절차는 또한 매우 간편하게 하였으며 한번 그 무리에 들어가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심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면서까지 사적인 빚을 받아내는가 하면, 부자들을 위협하고 양반을 모욕하였으며 관리를 꾸짖고 욕하며 구실아치와 군교들을 결박하는 등 번개가 치고 바람이 몰아치듯 기세를 올리며 쌓이고 쌓인 원한과 굴욕을 마음껏 풀었다.

동학교도들은 양반을 증오하여 반드시 욕을 보였고, 유교적 윤리와 신분 질서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보수적인 유학자였던 매천이 동학을 좋아할 리 없었다. 매천의 동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당시 유교적 질서 속에서 살았던 조선 지배층의 보편적인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봉건적인 신분제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매천의 뚜렷한 한계로 볼 수 있다.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기록하다

유학자로서의 뚜렷한 한계 속에서 동학을 바라본 매천이지만 역사가로서의 동학에 대한 기록의 정확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매천은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정확히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오하기문』에서 관군과 동학농민군의 초창기 모습을 비교해 놓은 부분을 보면 매천이 동학농민군에 대해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관군은 교만하고 거칠어서 다루기 어려웠는데 이런 것은 오늘 하루의 일이 아니었다. 행군을 하게 되면 연도에서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였고, 점포를 망가뜨리고 상인들의 물건을 겁탈하는가 하면, 마을로 가득 몰려가니 닭이나 개가 남아나는 게 없었기에 백성들은 한결같이 이를 갈면서도 겁이나 피했다. ……적은 관군의 소행과는 반대로 하기에 힘써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게끔 명령을 내려 이를 어기지 않으면서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며 행군하였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이나 동학군 양 진영은 모두 양식을 미리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간으로부터 먹을 것을 구하여야 했다. 그런데 민심을 등에 업은 동학농민군 진영에는 음식을 담은 광주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민심이 이반된 관군 진영에는 자발적인 지원이 전혀 없었음을 매천도 인정하고 있다. 매천의 이러한 본 대로 느낀 대로의 정직한 기록은 청군과 일본군을 비교해 놓은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매천야록』의 기록을 보면,

이 전쟁에서 왜인은 모든 군수물자를 다 자기 나라에서 수송해 왔는데, 땔감과 석탄까지도 그러하였다. 저들은 이르는 곳마다 물을 사서 마셨고, 군령이 매우 엄하여 우리 백성들이 군대가 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모두들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향도(嚮導,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청국군은 음행과 약탈을 자행하고 날마다 징발하기를 일삼아 관민이 모두 곤란을 당하여 그들을 원수 보듯 하였다. 평양이 포위되었을 때 문을 열고 왜를 인도한 자도 있었고, 청국군이 패하여 도망가 숨어 있으면 성 안의 백성들이 그 숨은 곳을 가리켜 주어 벗어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잘 알다시피 매천은 청나라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생각을, 일본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 ? 일 양군의 행동에 대해서는 보고 들은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은 엄격한 군율로 조선 백성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은 반면, 청군은 온갖 약탈로 백성들을 괴롭혀 당시의 조선 민심은 일본군에게 있었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매천의 역사 기록이 얼마나 냉정하고 엄정한 지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매천에게 동학농민군은 단지 ‘폭도’이고 ‘적’일 뿐이었다. 왜냐면 그들은 전통 질서를 파괴하는 반란군이었기 때문이었다. 마흔이 될 때까지 유교만 공부한 매천에게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일 성싶다.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은 아군, 동학농민군은 적이다

매천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부터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정확히 읽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군이 일본군의 협조를 받아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우금치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매천에게 있어 적어도 우금치 전투에서만큼은 일본군은 아군, 동학농민군은 적이었다.『매천야록』의 우금치 전투 부분을 보면,

적(賊, 동학농민군)들은 부적과 주문으로 탄환도 막아낼 수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속였고, 사람들은 이 말을 믿고 싸울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 경영의 병사들은 비록 양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군율이 엄하지 못했고 중과부적이었기 때문에 싸움에 불리했으므로, 드디어 왜(倭)에 원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왜군은 매번 선봉에 서서 사기를 높였으며, 군율이 엄하고 병기까지 정교해서 목숨을 걸고 진군해 나가니, 탄환이 매번 적의 총보다 몇 배나 더 나갔다. 적들은 비로소 두려워하며 기세가 꺾여 금방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운동의 향방을 가늠하는 결정적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경군이 진압하지 못한 동학농민군을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진압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서술하고 있다. 매천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적개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매천의 유교적 인식의 한계가 어디까지인 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길 정도이다. 이러한 매천의 한계는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의 처형 문제에서 절정에 이른다. 역시 『매천야록』의 기록이다.

호남 적당의 전봉준 ? 손화중 ? 최경선 ? 성두한 ? 김덕명 등이 처형되었다. 교수형으로 하고 참형을 시키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형제(刑制)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적당의 괴수들을 목을 베어 죽이는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고, 목을 옭아매어 죽이는 교수형(絞首刑)에 처했다고 탄식하고 있다. 참형도 교수형도 둘 다 목숨을 앗는 형벌이지만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둘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참형이 신체를 절단하는 극단적인 형벌이라면 교수형은 신체를 온전히 유지하는 다소 가벼운 형벌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조선 민중들이 전봉준의 죽음을 녹두꽃의 떨어짐으로 슬퍼할 때, 매천은 녹두꽃을 좀 더 잔혹하게 꺾지 않았다고 통탄해하고 있다. 반역 행위를 한 괴수에게 교수형의 예우를 갖춘다는 것이 유학자 매천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매천은 대쪽같은 선비였다. 세상의 유혹과 혼돈에 흔들리지 않는 곧음은 매천다움이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크다. 대나무는 자신의 중심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세상의 흐름, 즉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유연함으로 모진 바람을 이겨내며 더 큰 나무로 성장한다. 이에 반해 매천은 흔들리지 않음에 너무 많은 중심을 두다 보니, 정작 중요한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했다.

매천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 하는 부분은 동학에 대한 매천의 생각과 행동이다. 사람은 때로는 흔들려야 한다. 그동안 당연히 옳다고, 바르다고 여겨왔던 것들에 대한 혹(惑, 의심)이 필요하다. 쇠사슬 담쟁이 넌출 같은 삶을 견디지 못한 동학과 농민들의 들불 같은 저항이 일어나도 불혹(不惑)이 된 매천의 유교적 삶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었던 것이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