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판천을 통해 제국주의의 본질을 악데 되다
아관판천을 통해 제국주의의 본질을 악데 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4.05 09:48
  • 호수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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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은 제국주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정의(正義)는 ‘물리적인 힘’이었다.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처럼, 인간 세상에서도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였다. 재야 지식인이었던 매천은 이러한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청국은 우호적으로, 일본은 적대적으로, 서양제국에 대해서는 중립적으로 대하였다. 하지만 일련의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면서 매천의 대외인식에도 시나브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다

1894년, 청나라의 북양대신 리홍장(李鴻章)은 조선에 파견되어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이 중국에 속한 것은 이미 1,000여 년이 되어 각국이 다 알고 있다.”라고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대내외적으로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조선정부뿐만 아니라 당시의 일반 백성들도 반감 없이 수용하고 있었으며, 매천 역시 중국과 조선 사이의 조공 책봉 체제를 주종의 관계로 인정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의 청에 대한 사대적 인식을 잘 알고 있었던 리홍장은 만약 “조선이 일본을 두려워하여 중국에 속함을 부정한다면 중국은 반드시 군사를 동원해 죄를 물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단지 협박으로 그치지 않고 그는 실제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일본 군대도 바로 따라 들어와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매천야록』에는 그 때 리홍장이 파견한 수륙 양군이 일본에 대패한 대동구 전투에 관한 내용이 있다. 당시에 우리나라 안에서는 평양의 패전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하고 두려움에 떨며 다시 의지할 데가 없는 듯이 했으나, 일본에 빌붙은 시배들은 도리어 경사를 만난 듯 의기양양하였다

청군의 패전 소식에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일본의 승리에 도취된 친일 세력들을 증오하는 당시 조선의 민심을 잘 전해주고 있다. 매천의 심정도 이러한 민심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매천은 청군이 우리나라에 와서 끼친 민폐에 대하여 격분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청에 의지하여 외세의 침투를 극복해보려는 심정도 역력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다

1894년 즈음에 기록한『매천야록』의 기사를 보면, 매천은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강화도 조약 제1조의 ‘일본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생각하며, 원래 자주국인 일본과 평등의 관계를 갖는다’와 톈진조약의 ‘후일 조선에서 사건이 발생하여 중·일 양국이 파병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서로 알린다’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는 대개 일본이 교활한 음모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면 불가불 청국과 절교시켜야 되겠고, 청국과 절교시키려면 불가불 조선을 자주국으로 만들어야 하겠기 때문에 강화도 조약에 그런 조항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에 내란이 많은 것을 헤아려 필시 청국에 구원을 청할 것을 기대하고, 파병 시에 서로 통지한다는 조문을 집어넣었으니, 우리의 목을 조이고 등을 어루만지는 계책을 쓰려했기 때문에 톈진 조약이 있었던 것이다.

매천은 일본이 1876년에 강제 체결한 강화도조약 제1조에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하게 하여 청과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끊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음을 간파하였다. 또 우리나라는 내란이 많아 언제라도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할 때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1885년 청·일 양국이 맺은 톈진조약에 양국이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알린다는 조문을 삽입하였음을 꿰뚫어 보았다.

이처럼 매천은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려는 치밀한 계획 속에 두 차례의 조약을 맺었음을 알고 일본을 철저히 배척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일본의 침탈을 조선과 청의 전통적인 관계 속에서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아관파천을 통해 서양의 본질을 알게 되다

1866년 9월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나타났을 때, 매천은 그것이 단순히 순찰하기 위함일 뿐 침략할 뜻은 없었다며 그들에게 별다른 적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병인양요 당시 12세였던 매천의 생각이 아니고,『매천야록』에 병인양요 기록을 하던 1894년 즈음 마흔이 된 매천의 생각이다. 병인년(1866년) 9월, 프랑스의 선박이 강화도에 정박했다. 이 선박은 훈련하기 위해 온 군함으로 침략이나 약탈할 의사는 없었다. 어떤 이는 장경일 등을 죽이고 ‘양금(洋禁)’, 즉 서양 선박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와서 보복한 것이라고 하였다.

병인박해를 핑계로 일어난 병인양요가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의 공식이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매천의 대외 인식의 편협함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매천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던 재야의 지식인이었다는 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매천은 동시대에 살았던 김윤식(1835~1922), 유길준(1856~1914), 박은식(1859~1925) 등이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에 비한다면 서양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그들의 침략 의도를 파악하는 데도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매천의 한계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침략에 협조적임을 보고 서서히 극복된다. 조선 땅에 대한 침략 의도를 가장 먼저 드러낸 서양 국가는 러시아였다. 아국인은 우리나라를 점거하려고 하였는데, 일본에 선수를 빼앗겨서 늘 유감스럽게 여기며 틈이 있을까 엿보던 차였다. 이에 8월 이후 이범진 등이 아국 공관에 몸을 숨기고, 그들에게 뇌물을 후하게 바치고서는, “국면을 뒤집는 데 힘이 되어 준다면, 마땅히 온 나라가 명령대로 따르기를 일본을 섬기는 예처럼 하겠다.”고 하였다.

아국 공사는 기뻐하며 응낙하고, 그들 군대를 파견하여 인천항에서부터 계속 서울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이범진 등은 교자 두 채를 세내어, 왕과 태자를 태워 아국 공관으로 옮겼던 것이다. 1896년의 아관파천에 관한 기록이다. 러시아가 조선을 점거하려는 의도에서 친러파 이범진의 요청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여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과정을 적고 있다. 러시아를 일본에 이은 또 하나의 침략 세력으로 파악한 매천의 시각은 예리하였다.

그동안 서양 세력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매천은, 아관파천을 통해 조선이 세계 각국의 표적이 되었음을 알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
아관파천을 통해 제국주의의 본질을 알게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