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매천의 붓 끝에서 온전할 수 있으리오
누군들 매천의 붓 끝에서 온전할 수 있으리오
  • 광양뉴스
  • 승인 2010.04.12 09:20
  • 호수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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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 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14)

조선 시대 최고의 권력자는 군주이다. 그러나 매천이 살던 시대의 군주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때로는 군주가 아니었던 군주의 살아있는 아버지가, 때로는 왕비와 그의 일파가 권력을 오로지하였다. 완고한 반골 지식인이었던 매천은 최고 권력자가 누구이던 서슴없는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그래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즉 ‘누군들 매천의 서릿발 같은 붓 끝에서 온전할 수 있으리오’라는 말까지 낳았다.

세 분의 군주를 비판하며 섬기다

매천은 일생을 통해 철종·고종·순종을 군주로 섬기었다. 세 군주 중 고종의 재위 기간( 1863~1907)과 매천의 일생(1855~1910)은 거의 일치하였다. 그래서 매천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고종에게 집중되었다.
『매천야록』을 보면 고종에 관한 기록은 소상하고 많은 편이나, 매천 유년 시절의 철종(재위 1849~1863)과 말년의 마지막 황제 순종(재위 1907~1910)에 관한 기록은 소략한 편이다.

먼저, 철종에 관해서는 이건창의 할아버지였던 이시원의 이야기를 적으면서 조금 언급하였다. “철종은 천성이 유약하고 어두운 데다가 (안동) 김씨들에게 견제당하여 관리 한 사람을 임명할 때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였다.”라고 아주 무능한 군주로 기록하였다. 짤막한 글이지만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기세에 눌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강화 도령’ 철종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매천야록』의 기록은 고종의 잠저(潛邸), 즉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운현궁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그곳에서 관상가 박유붕이 명복(命福, 고종의 아명)을 보고 ‘천일지표(天日之表, 임금)의 상’임을 누설하였고, 몇 년 후 열세 살에 등극하였음을 적고 있다. 이후 혼란한 정치구도 속에 부화뇌동하는 고종의 모습을 숨김없이 그려냈는데, 매일 궁궐 내의 대소 연회에 빠져 음란한 생활을 일삼으며 정치에 소홀했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 과거조차도 하나의 유희로 생각하여 필요이상으로 자주 치러 신중해야 할 인재의 등용을 장난처럼 여겼다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고종의 무능함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군주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갖추었다. 그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황현은 ‘충’이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의 유학자였고, 그것은 그의 정치적 판단과 위정자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순종에 이르러 실종되고 말았다.

태황제(고종)는 비록 사리에 어둡고 행실이 용렬하지만 그래도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황제(순종)는 천성이 어리석어 배고픔과 배부름, 추위와 더위도 잘 느끼지 못하므로 많은 군소배들은 그를 야유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청맹과니로 묘사하고 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 당하고 순종이 허수아비 황제가 되는 상황을 보며 매천도 더 이상 군주에 대한 예우를 갖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망국의 상황을 초래한 무책임한 군주가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며 좋아하다

군주는 아니었지만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도 매천의 붓끝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둘째 아들이 즉위한 186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1873년까지 10년 간 섭정하였다. 매천은 흥선대원군이 남면(南面, 임금의 자리에 앉는 것)만 안 했을 뿐이었지 군주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평하였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처음 집권한 후 어느 공식 석상에서 기세를 돋우며 여러 재신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였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으로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내려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한다. 공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개 천리를 지척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종친을 우대한다는 뜻이요, 태산을 깎아내리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제하겠다는 것이요,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겠다는 것은 남인을 기용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선언대로 흥선대원군은 집권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여 세도정치의 폐단을 시정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였다. 매천은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개혁정치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도 지도자로서의 한계는 있었다. 매천은 흥선대원군이 공정무사해야 하는 정치에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임했던 점을 큰 실수로 지적했다. 특히 인재등용에 있어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남용하여 고종을 비롯한 주위의 불만을 샀다고 평하고 있다.

운현(흥선대원군)이라는 사람은 장동 김씨의 부귀를 부러워하다가 하루아침에 뜻을 얻자 사치와 교만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었던 것이 장동 김씨에 비교해서 오히려 더한 편이었다. 그리하여 원기를 훼손한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으며, 한갓 토목공사에 매달리고 색목에 편들기로 10년 사업을 삼았으니, 오호라, 이는 시운이었던가

세도정권의 권력남용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흥선대원군이 세도정권보다 더 심한 타락상을 보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래도 매천이 가장 좋아한 권력자는 흥선대원군이었던 것 같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사망하였을 때 매천은 다음과 같이 그의 삶을 평가하였다.

이하응은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공과가 상반하였다…국가에 무슨 변이 있으면 군중들의 추대를 받아 누차 일어났지만 그 때마다 좌절되어 거의 자멸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이고 그 명성도 외국에까지 들리므로 조야에서는 그를 大老로 의지하여 그가 사망할 때는 원근이 모두 슬퍼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공과는 반반이었다고 평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마침내 그가 죽었을 때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였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매천의 꼬장꼬장함은 살아 있었다.
『매천야록』의 다른 부분에서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백성들은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하여 종종 한숨을 쉬며 도리어 운현의 정치를 그리워하였다…운현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끼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매정하지만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대원군의 정치에 대해서도 민심을 반영하여 ‘있는 그대로’ 평가하였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