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서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서다
  • 최인철
  • 승인 2010.04.19 09:52
  • 호수 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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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면 생쇠골 야철지에서 만난 황병학


녹슨 기억들은 오랜 세월을 흐르는 동안 흐릿하게 변한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흐릿한 그림자 같은 것으로 증유된다. 실재했으나 현재는 그 실재를 가늠할 수 없는, 그러나 실재했음을 기억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흔적이라 부른다.

흔적이란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를 모두 일컫는다. 예컨대 흔적은 생물의 현재 모습에도 남아 있다. 생물의 기관 가운데 그 이전에는 생활에서 쓸모가 있었으나 현재는 쓸모없이 흔적만 남아 있는 부분들, 사람의 꼬리뼈나 귀를 움직이는 근육, 고래의 뒷다리 따위가 그것이다.
사람들도 저마다 세월의 흔적을 안고 살아간다. 태어나면서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흔적은 우리의 삶을 시작하고 규정하는 근본이 된다. 한 생명이 수정되고 그 생명은 태아가 된다는 게 우리 삶의 시작이라면 그 생명의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눈 사랑의 흔적이 바로 그 생명이다. 또 태아가 생명의 젖줄인 어머니와의 교감을 이루고 새 숨을 연결시키는 것이 탯줄이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그 탯줄의 흔적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배꼽이라고 부른다.

이후의 모든 삶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은 없다.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흔적인 셈이다. 밥을 먹고 배설하는 생체적인 것에서부터, 사랑하고 이별하는 일,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흔적은 남는다. 그 가운데 뼈아프게 상처 받았던 기억을 상흔이라 일컫는다. 생채기의 기억이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가슴에 모래바람 일으키는 심리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았던 모든 시대는 역사가 된다. 더나가 그것은 공동체의 삶과 방식에 어울려 정신과 사상으로까지 치달아 올라가 역사가 되고 문화와 문화유산이 되고 공동체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도저한 흔적으로 여전히 생물(生物)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그 흔적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남길 흔적을 짐작하기도 하고 태산의 지석으로 삼기도 하면서 흔적으로부터 필연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흔적은 실체의 그림자를 남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우리의 옛이야기를 간직한 문화유산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나보는 것만큼 뜻 깊은 나들이도 없으리. 겨울이 지나고 봄의 경계선이 완연한 나날들이 산과 들을 신록으로 물들여 놓았으나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문화적 흔적을 더듬어보는 여행은 색다른 감동을 안겨주지 않겠는가.
지금 오르는 이 산길도 그 흔적을 따라 걸어가는 길인 셈이다. 진상면 구황마을에서 시작하는 억불봉길. 그곳에는 한일강제병합에 맞선 의병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진상면 황죽리 구황마을에서 백운산 억불봉쪽으로 비포장도로와 계곡등산로를 따라 2.5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면 야철지가 있다. 이곳은 해발 고도상으로 450미터에 이르는 고지대다. 야철지는 등산로에 바로 인접해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 불과 10미터 정도 떨어져서 풍부한 수량의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제철에 안성맞춤이다.

이곳은 칼과 창 등 옛날 무기를 제작 하던 곳이다. 무엇보다 진상면 비촌마을 출신으로 일제에 항거해 분연히 총칼을 들고 일어났던 의병장 황병학의 흔적이 고스란한 곳이다. 진상면 비촌 출신 애국지사 황병학(1876~1931)은 19세기부터 조선침략을 자행하는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1908년 음력 7월 하순 백운산 먹뱅이에서 분연히 일어났다. 이 자리에 모인 약 200명 내외의 의병들. 그들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액이 머리에까지 박두했으니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는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는가” 라는 맹세를 나눈 뒤 의를 행하고 나라를 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황병학은 32세의 나이로 의병장에 추대됐다. 그의 종숙인 황숙모가 선봉장을 맡았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청장년층으로 구성됐고 지역적으로는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 및 경남 서부지역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민들이었으나 게중에는 짐승을 잡아 생계를 꾸리던 산포수들도 적지 않았다.

의병장 황병학은 백운산 먹뱅이 계곡의 임방골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인근 부호들로부터 군량과 군자금을 지원받아 일제와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 온 산에 구국을 위한 강경한 사내들의 눈빛이 형형했으리라. 황병학은 기 같은 기세를 등에 업고 또 의병의 취약점인 화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백운사과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산포수들을 불러 모아 무기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물론이다. 무기제작에 나선 그들의 정성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목숨을 초개처럼 여겼던 의병들의 삶을 통해 고스란히 우리에게 투영돼 온다.
무기를 제작하기 위한 야철로가 백운산 억불봉 아래 지금의 생쇠골에 만들어졌다. 당시 광양지역의 의병들은 철광석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생쇠골 바로 아래 평촌마을에 농기구와 솥 등을 만들던 철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촌마을 철점은 흔리 점터 점골로 불렸으며 채광한 굴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무쇠를 구입하여 백운산 본진으로 운반, 그곳에서 대장간을 차리고 창과 칼을 만들어 항거의 무기로 사용했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이렇게 억불봉 아래 생쇠골을 비롯한 여러 곳에 야철로를 확보하고 무기를 자체적으로 제작해 조달했다. 역사는 황병학 의병부대의 활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록 일제의 기록이지만 그들의 웅혼한 나라사랑을 바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1908년 9월 1일 오전 3시 비도(의병들) 50명이 광양군 진하면 망덕리에 내습, 일인 어부 오까야마현 사람 가꾸노와 그의 처 이소 및 장남 아끼라를 총살하고 가옥을 불사른 다음 이 마을의 잡화상 고오지현 사람 이시다집에 내습, 고용인 다까하시를 바다에 던져 익사케 하고 또 해안에 매어둔 일본어선을 불살랐다”
이렇게 생쇠골 야철지는 황병학의 의병부대는 일제와 맞서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광양시지에 따르면 이후 ‘일제의 군경에 쫓긴 황병학 부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옥고원의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선도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그들은 대한민국 건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일제의 토벌에 흩어지고 황병학이 만주로 건너가지 전까지 의병들의 생활과 삶의 일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당시 의병의 형태가 게릴라전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백운산의 지세가 큰 역할을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이곳에 서면 황병학의 의로움이 가슴에 바람을 일으킨다. 이후 황병학 부대는 일제에 의해 쫓기다 대부분 참혹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 생명을 버림으로써 나라를 구한 숭고한 뜻은 곳곳에 붉은 피의 흔적을 남겨놓고 여전히 한민족의 대동맥을 타고 흐른다.

결국 황병학은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명을 띠고 귀국하다 신의주에서 체포, 항일투쟁으로 인한 일제의 고문의 깊은 후유증으로 1931년 4월 잔설이 남아 있는 백운산 비촌마을에서 숨을 거뒀다.
21세기의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올해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해다. 개항과 서양문화 도입, 한일강제병합과 식민통치로 점철된 한국 근대사는 역사가 남긴 흔적이 됐다. 그러나 선조들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후손들이 그 역사가 남긴 흔적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