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광의면 월곡 마을로 이사하다
구례 광의면 월곡 마을로 이사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5.03 09:30
  • 호수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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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외수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길섶에 피어있는 들꽃 하나에도 뼛속까지 투명해지는 나이"라고 표현하였다.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 감동을 느끼고 세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나이라는 뜻이다. 나이 쉰을 앞둔 매천을 뼛속까지 투명하게 만든 작은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지리산 앞자락의 들과 강이 아니었을까?

 

지리산 앞자락의 월곡 마을로 이사하다

 

매천은 17년간의 구례 간전면 만수동 생활을 청산하고, 1902년 11월 29일(음) 구례 광의면 수월리 월곡 마을로 이사하였다. 매천의 나이 48세 때였다. 만수동과 월곡 마을은 불과 삼십여 리 떨어진 거리에 불과하지만 그 땅의 생김새는 판이하였다. 매천이 삼사십 대에 애오라지 깃들어 살았던 만수동은 숲 우거지고 벼랑이 자못 깊은 백운산 뒷자락의 답답한 산골이었다. 반면 새로이 이사한 월곡 마을은 지리산 앞자락의 사방이 확 트인 평야 지대였다. 매천은 바위 험한 산속에서 섬진강을 건너 숫돌처럼 평평한 광야로 나갔던 것이다. 이사한 첫 날 시흥(詩興)이 일어나 한 수 지었다.

 

擧眼皆康莊 눈 들어보니 사방이 모두 환해서

不必求福地 굳이 복된 땅을 구할 필요가 없네

苦覔桃花源 애써 도화원의 세계를 찾았으니

諒是愚夫事 진실로 어리석은 대장부의 일이었네

 

나귀가 곧장 문 앞에 이르고, 밤 깊은 냇가에 달이 바로 떨어지는 동서남북이 훤히 트인 열린 공간으로 나온 기쁨을 노래하였다. 인생은 어차피 눈 흙탕길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젊은 시절 애써 도화원을 찾으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였다.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인생을 달관한 듯한 여유가 엿보이는 시다. 사실 매천이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움을 간직하였던 때가 월곡으로 이사하기 전후의 시기였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매천에 관한 논문과 글에서는 만수동에서 월곡 마을로 이사한 것을 두고 매천이 은둔 생활을 접고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만수동으로 이사하기 전 ․ 후의 매천 글을 살펴보건대 확실하게 매천 사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글은 없다.

 

만수동으로 이사하기 보름 전인 11월 15일(음),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고 사모하던 면암 최익현에게 같은 고을에 사는 진사 고원후가 지은『가경(家警)』이란 문헌의 서문을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 고원후의 후손들이 매천이 전날에 최익현을 만난 일을 알고서는 부탁한 것이었다.

 

저는 궁벽한 곳에 틀어박혀 듣는 것이 없어 스스로 버려진 사람으로 달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 부들과 버들같이 연약한 몸이라 건강한 날이 드뭅니다. 요사이는 또 강북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산을 사서, 거문고와 책은 묶어 놓고 닭과 개를 쫓느라 온 집안이 분요 중에 있습니다.

 

만수동에서 섬진강 건너 삼십 리쯤 되는 곳은 바로 월곡이었다. 그곳으로 이사하기 위해 산을 구입하여 닭과 개를 기르고 있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부담 없이 쓴 편지이다. 한말의 대표적인 위정척사파 최익현에게 보내는 편지임에도 딱딱한 사상과 시국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고원후 후손의 부탁을 넣기 위한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사한 한 달 후 계묘년(1903) 정월 초하루에 지은 시에서는 “귀밑머리 희어짐이 심한 것 같아, 거울 속 그대가 나인가 의심스럽네”라고 자신의 늙어감을 애통해 하였고, 정월 보름에는 달빛을 보며 손자의 생일 잔치를 기뻐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동생 황원이 아들을 낳은 것을 축하하였고, 동생 계방과 어느 해보다 많은 시를 주고받으며 형제애를 나누었다. 이전보다 오히려 더 가정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한 시가 많은 것을 보면, 여전히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기, 매천의 처사적 삶을 비판하다

 

매천은 만수동에서 월곡 마을로 이사한 후에도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정계에 나가지 않는다는 유교적인 군자상을 지키고자 하였다. 군자란 ‘치즉진 난즉퇴(治則進 亂則退)’, 즉 천하가 태평하면 나아가 일을 하고, 천하가 혼란하면 초야로 물러난다. 이러한 매천의 처사적인 삶을 정면으로 비판한 이가 친구 이기(1848~1909)이다.

 

이기는 전북 만경(지금의 익산)의 한미한 선비 집안 출신이다. 이기와 매천은 어린 시절에 구례의 왕석보를 스승으로 모신 인연으로 망년지우(忘年之友)가 되었다. 매천이 구례 만수동에 은둔할 즈음에 그도 구례 북쪽 천마산 골짜기에 터를 잡아, 둘은 지척의 거리에서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그러나 둘의 타고난 성향과 세상을 보는 눈은 달랐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생각과 대응 방식에서 둘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였다. 매천이 동학농민운동을 ‘동비의 난’으로 비판하며 역사 기록을 시작할 때, 이기는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을 만나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매천이 차분하고 생각이 깊은 보수주의자라면, 이기는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행동주의자였다.

 

이후 이기는 김개남을 만나면서 농민군에 실망하고서는 반대로 동학농민군과 의병의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기는 이율배반의 모순된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매천은 친구 이기를 ‘앉아서 말하고 서면 행동하는 사람이며, 국가의 위기에 혼연히 일어설 수 있은 인품을 지닌 자’라고 좋게 평가하였다. 반면 이기는 매천의 처사적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침내 1903년 매천에게 편지를 보내 구국 운동의 일선에 나설 것을 충고하였다.

 

이제 국가의 위기가 마치 두 마리의 호랑이가 고기 한 점을 다투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형세를 잘 살펴 호랑이끼리 다투다 죽게하고 고기가 또 보전되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일본에게 병합되지 않으면 반드시 아라사에게 병합될 것이니, 비록 어리석은 소인도 그 두려움을 아는데 형은 임하에 높이 누워 책을 읽고 시를 읊으며 편안한 듯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일신의 계책으로서는 참으로 좋을 듯합니다만 후세의 아라사와 일본의 역사를 쓰는 자가 집필하면서 쓰기를 ‘모년 모월 모일 처사 황현이 죽었다’라고 한다면 어찌 영광스럽게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생각은 만족스럽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나는 명예로운 처사가 되었지만 나의 모친과 처와 자손이 모두 적의 포로가 되는데 있어서는 마침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기는 러 ․ 일 전쟁이 임박한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도 수신(修身)에만 힘쓰고 있는 매천의처사적 태도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다. 지금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나라를 잃고 가족들을 외세의 노예로 만들고 나서야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매천에게 충고하고 있다.

 

한편, 이기는 나철, 오기호 등과 을사오적의 암살 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실패하면서 진도로 유배를 가기도 하였고, 유배에서 서울로 돌아온 이후로는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하다 1909년 서울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자기향기를 팔지 않는다

 

그러나 이기가 비판하는 것처럼 매천이 현실을 외면하고 은둔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매천의 문인이었던 박문호가 <매천황공묘표>에서 ‘은처전야, 심불망세(隱處田野, 心不忘世)’라고 하였듯이, 매천은 향리에 은거해 있으면서도 세상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월곡으로 이사하기 전 목포지방을 여행하면서 쓴 <발학포 지당산진(發鶴浦 至糖山津)>이란 시를 보면,

 

海禁開時國已愚 개항은 나라에 이미 어리석은 일

空聞關稅較錙銖 한두 푼 관세 이익 얻을 뿐이었네

漆箱磁盌知安用 옻칠한 상과 자기 그릇 어디에 쓰랴

擲盡東南萬斛珠 싼 값에 귀한 쌀만 다 흘러 나가네

 

일본 상인들에게 입도선매(立稻先賣) 당한 호남지방의 쌀이 목포항을 통해 해외로 대량으로 유출되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매천은 개항 이래 외래 상품의 수입과 미곡의 수출은 결국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탈로 이어지기 때문에, 관세를 붙인다 하여도 큰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매천야록』에서 그는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태반이 칠기, 비단 등의 사치품이며, 우리나라의 수출품은 전부가 곡물, 가죽, 금, 은 등의 천연물이라고 하면서 “나라가 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한 바 있다.

 

매천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사한 월곡 마을의 당시 이름은 ‘달실’이었다. 매천은 당호를 대월헌(待月軒), 즉 ‘달을 기다리는 집’이라 지었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 않는다는 점에서 군자의 절개를 상징한다. 매천은 그곳에서 절개를 지키며 군자처럼 고고히 인생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대월헌 주변에 오동나무와 매화를 심었다. “오동이 천년을 묵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가 일생을 춥게 살아도 자기향기를 팔지 않는” 것처럼 지조를 지키는 삶이 본인이 하늘로부터 받은 명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