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와 종말
폭력의 역사와 종말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15:44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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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렬 목사 / 마하나임커뮤니티교회
폭력이 극에 달하고 있다. 가정, 학교, 사회, 정치, 문화, 미디어, 어느 곳 하나 폭력에 노출되지 않고 물들지 않은 곳이 없다.

폭력의 형태 또한 점점 더 잔인하거나 집요해지고 있다. 때와 장소,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행해지는 폭력에 넌더리가 날 정도다. 텔레비전과 신문을 보는 것도 겁이 나고, 거리를 걸어가거나 밤늦게 귀가 할 때도, 몰려다니는 아이들이나 사람들을 만날 때면 흠칫 놀랄 때도 많다. 영화 같은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그게 이렇게 현실 속에서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새삼스럽진 않다.

그만큼 폭력의 역사는 우리에게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폭력을 복수하거나 분노를 잠재우는 장면들로 대리만족하다가 어느새 그렇게 눈으로 보는 일이 우리에게 잠재된 폭력을 끄집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2005년도에 개봉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의 역사”라는 영화에서는 이러한 인간심리를 잘 반영한 영화다.

폭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긴 복합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단순하게 발현을 말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성에 있어서 폭력의 발생은 본능적(本能的-S.프로이트나 K.Z.로렌츠 등이 이 이론을 지지함)으로 보느냐 학습적(學習的-J.덜러드의 ‘욕구불만공격설’, A.반두라의 ‘관찰학습설’은 이를 지지한다)인 것으로 보느냐로 나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폭력은 학습적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갓난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욕구불만을 통해서 행하는 폭력을 보면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시나 본능적(本能的)인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그 강도(强度)가 더해지는 것은 역시 학습을 통해서 더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폭력의 발현을 죄(罪)에서부터 시작한다.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범죄한 후에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에 가인과 아벨이 있었고, 아버지 아담의 범죄는 가인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최초의 폭력은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가인이 질투와 분노로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가인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게 시작된 폭력은 그의 후예 가운데 ‘라멕’이라는 사람 때에 극에 달한다. 라멕은 더욱 잔인하게 기분 내키는 대로 살인하는 폭력을 자행하고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는 뻔뻔함을 드러낸다. 결국 이러한 폭력이 난무(亂舞)하게 됨은 노아의 홍수로 심판을 받게 된다.

한참 후에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멸망한데도 그 안에서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폭력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가인의 후예(後裔)들이 등장하고, 그렇게 시작된 폭력의 역사는 태고(太古)로부터 지금까지 집요하게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의 억제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율법이나 국가의 법(法)에는 다양한 형태의 규제를 두었다. 하지만 그러한 규제를 악용하고 원래의 취지를 바로 지키지 못한 또 다른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폭력을 억제하기 위해서 사용된 또 다른 폭력(합법적으로 인정받은 폭력은 권력(權力)이라 한다.

여기에는 군대, 경찰, 교도소등이 있다)으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그 모든 죄악의 결과인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참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지금 드라마나 각종 영화에서처럼 분노를 조장해서 폭력과 복수를 정당화 시켜 응징하고 잠재우는 방식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는 방법이다.

부모나 자녀 간, 형제간의 폭력을 무엇으로 잠재우겠는가? 스승과 제자사이의 폭력을 무엇으로 막겠는가? 사회 구성원간의 폭력은 또 어떻게 잡을 것인가? 정치계의 폭력은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 마르크스의 ‘폭력혁명론’적인 지금 우리 정계(政界)의 폭력을 마하트마 간디가 보면 뭐라 할까? 그리고 스포츠라는 말로 바뀐 많은 운동들이 폭력과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때리고, 차고, 먹고, 죽이고, 이기고…월드컵과 지방선거에 온나라가 시끌시끌한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두렵다) 글과, 말로, 그리고 다양한 제스처와 행동으로, 그리고 법으로 행한 폭력이 형태만 다를 뿐 결국 한통속이고 그 종말은 망조(亡兆)와 망국(亡國)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치료할 사랑마저도 값싼 싸구려 양아치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 대중문화와 시류의 풍조가 개탄(慨嘆)스럽기만 하다. 사랑을 노래하고 말하고 추구하면서도 정작 참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안타까움은 더해만 간다.

너무도 당연한 사랑의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신기함으로 다가오는 이 시대에 참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망국을 막는 일이라니 새삼 어깨가 무거워진다.

정계와 학교, 그리고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잘잘못을 따져 다그치지 않고 그들을 넉넉하게 품고 치유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나누는 일이 지금은 어리석게 보이고 부질없어 보이고 구태의연하다고 할지라도 결국엔 결단코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입력 : 2006년 05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