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같이 글만 아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나같이 글만 아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 광양뉴스
  • 승인 2010.05.31 10:04
  • 호수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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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21>

한말의 의병 투쟁은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을미년(1995) 이후 그 동안의 의병이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유생 의병장이 이끈 오합지졸의 평민 의병들이었다면, 정미년(1907)에는 해산된 군인들이 동참함으로써 의병의 화력과 조직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이제 단순한 의병 ‘투쟁’이 아닌 ‘전쟁’의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매천은 마치 ‘종군 기자’가 된 듯 의병들의 활동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해산 군인, 의병에 합류하다

1907년 6월 9일(음력), 이등박문과 이완용은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한 상태에서, 해아(海牙,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구실로 고종에게 선위(禪位, 황제의 자리를 태자에게 물려줄 것)를 강요하였다.『매천야록』에는 이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고종은 (선위를) 윤허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폐하는 오늘날을 어떤 세상으로 알고 계십니까?”하고 소리쳤다. 이때 황제를 모신 무감과 아전들이 제법 많았는데 이완용의 태도를 보고 분노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모두 황제의 한마디 말을 기다려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고 이완용을 칼로 찔러 만 갈래를 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참담한 표정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있다가 이완용을 흘겨보며, “그렇다면 선위하는 쪽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이완용 등은 물러났다.

일제와 이완용의 협박에 무력하게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는 장면이다. 곧바로 양위 조서가 내려지고, 이틀 뒤 순종이 즉위하였다. 이어서 6월 15일(음력)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급기야 6월 22일(음력)에는 이완용이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조칙을 황제의 조서라고 속여서 발표하였다. 6월 23일(음력), 각 부대장을 불러 부대원을 거느리고 훈련원으로 모이도록 했다. 먼저 맨손으로 무예를 익힌다고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일본인은 병사들이 군영을 떠나는 것을 엿보다가 틈을 타서 들어가 총포를 거두어 갔다. 여러 부대의 병사들이 훈련원에 이르러 무예 익히기를 마치자, 은사금이 나와 조칙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하사 80원, 병졸 50원, 그 다음은 25원이었다. (비로소 일의 전후를 알아차린) 부대원들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지폐를 찢어 버리고 통곡하면서 군영으로 돌아가니, 병기가 모두 없어졌다. 드디어 각자 흩어져 돌아갔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일제와 친일 매국노들의 치밀한 공작에 의해 창졸지간에 해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1907)은 차고 있던 칼로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대대장의 자결 소식에 격분한 그의 부하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98명이 전사하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등박문은 각도에 전보를 보내 중앙의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것과 같은 수법으로 지방의 진위대를 해산시켰다. 다행스럽게 안동과 원주의 진위대는 기미를 알아채고 총을 메고 흩어져 의병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과정이『매천야록』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와중에 진위대에 대한 부정적 기록도 있다.

각도에서 진위대를 창설한 뒤로 도적질이 그치지 않았으나 능히 금하지 못했고, 군사들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며 백성들을 물고기 잡듯 짐승 사냥 하듯 하였다. 그러므로 지방에서는 그들을 두려워하기를 이리나 호랑이 보듯 하였고,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하였다. 그 군대가 해산됨에 이르러 무지한 백성들은 손을 들고 좋아하였다.

진위대는 해산되기 전까지 일본군과 함께 의병 진압에 동원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일본이 매우 두려워하는 일이었지만, 매천은 진위대에 대한 지방 백성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비록 우리에게 불리한 이야기이지만 보고 들은 대로 사실을 기록하는 것, 역시 매천다움이다.

연곡사에서 의병장 고광순을 조상하다

한편, 군대 해산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가열차게 일어났으나, 유독 호남 지방에서는 의병 봉기가 한산하여 매천을 포함한 호남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전라남북도에 의병이 봉기했다. 6월 이후 관동과 영남 지방에서는 의병이 날로 치성하였는데, 오직 호남에서만 의병이 없어 사람들은 호남의 부끄러움으로 여겼다. 이때에 이석용은 임실에서, 김태원은 함평에서, 기삼연은 장성에서, 문태수는 무주에서, 고광순은 동복에서 기병하여 일시에 바람 일듯 일어났다. 그렇지만 경비와 복장이 볼품없고 기율도 없어 감히 일본군과 혈전을 벌이지 못하고 오직 형세만 일으켜서 교란시키는 데 그쳤다.…고광순은 지리산에 들어갔다가 패하여 죽었다.

늦게나마 호남 지방 여러 곳에서도 의병이 봉기하여 체면은 세웠지만, 그 세력이 미미하여 일제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매천은 당시 의병의 무기와 훈련 정도로는 일본군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로 근거지를 옮긴 고광순이 사람을 보내와, 더 많은 의병들을 모을 수 있도록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격문을 하나 써 주기를 청하였지만, 매천은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그날 밤 격문을 썼으나, 고광순이 다시 오지 않아 전해주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광순이 연곡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가 그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가을바람 쓸쓸히 부는 그의 무덤 옆 국화를 보며, “나같이 글만 아는 사람이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我曹文字終安用)”하고 자신의 문약(文弱)함을 자책하였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