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어장과 금광에 둘러쌓인 명당
황금어장과 금광에 둘러쌓인 명당
  • 박주식
  • 승인 2010.06.14 09:35
  • 호수 3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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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고장 ‘초남마을’
“봉화산 등에 지고 돋아난 초남. 명산 백운산의 명수(明水)도 앞으로 흐르네.
 물줄기 따라 서남쪽으로 향한 어부의 배 언제 돌아오나
뱃머리 기다리는 가심 부픈 부녀들”
<초남 마을 전래 향가>


백운산에서 시작 된 동천과 서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초남 갯벌은 수산물의 보고,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는 천혜의 황금어장’이었다.
초남 개흙을 먹은 고기는 특히나 맛이 뛰어났고, 그래서 광양읍 사람들은 초남 어부들이 가져온 수산물을 늘 우선하여 구입했고, 초남 산 수산물이 바닥이 나서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한다.

갖가지 생선에 반지락, 꼬막, 낙지 등 별의별 수산물을 태산같이 싣고 날랐다니 작은 어촌 마을 치곤 삶의 윤택함도 남달랐을 법하다.

초남마을은 초남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500여 년 전 성(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뤘고, 이후 고(高)씨 손孫)씨 순으로 입촌했다고 전한다.
마을 주민들이 전하는 초남마을의 원래 이름은 초남(草南)인데, 바다건너 해창조(海倉租)를 넣어두던 창고(세풍리 해안에 있었음)에서 조(租)를 실러갈 배들이 수심이 깊은 이곳 초남 해안에 정박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초남 해안에는 선원들이 이용하는 주막들이 많았고, 주막에서 항상 노래 소리가 흘러나와 이를 노래 잘하는 앵무새에 비유, 남쪽에 있는 앵무새란 뜻으로 초남이라 칭하였다 한다. 이 초남이란 한자어는 우리말로 풀이돼 ‘새냄’이 됐고, 초남포는 ‘새냄개’로 풀이돼 초남마을을 칭하는 이름으로 쓰였다.

“세상은 초남마을에 아픔만 줘
         주민들 서운함 달랠길 마련돼야”



한해동안 풍어와 어로의 무사함을 빌며 제사지냈던 '굴할매'

한편, 초남(草南)을 ‘새남이ㆍ새냄이’라고도 부렸다는 것 까진 같지만 여기서 새는 쇠(金)의 방언이고 ‘-남이-냄이’는 ‘생산되다, 산출되다’의 뜻을 갖는 ‘~나다(産)’의 의미를 지녔으므로 ‘새남이 새냄이’는 ‘금이 나는 마을’의 뜻을 지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새냄이를 한문 식으로 음차 하여 새를 풀(草), -냄이는 소리 나는 대로 ‘남(南)’으로 하여 초남(草南)으로 한 것이라는 것.

이와 관련 초남 하면 초남광산(금광)을 먼저 떠올리는 것에서 그 유래를 짐작케 한다.
일명 초남광산이라고 하는 광양광산이 자리했던 곳은 초남마을과 현월 마을의 중간지점. 이곳에서 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06년 김순서와 김순여가 초남리와 사곡리 일대에서 광맥을 발견, 채굴한 것이 광양광산의 시초다.

이후 광산은 일본인에게 양도됐고, 1933년엔 일본인재벌인 야구(野口)에 의해 일실광업(주)로 운영됐다. 이후 중일전쟁으로 산금정책이 장려되며 한때 종사인원 3천명에 월 생산순금이 80kg에 이르러 광양읍내의 경제를 좌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초남광산은 해방 후 일시 폐광됐으나 1958년 사곡리에 거주하던 하태호가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침수됐던 갱내를 복구하고 근대적 부유선광 시설을 갖추고 채광에 나서 월 40kg의 금을 생산했다. 1965년엔 국내최초의 온식제련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초남광산의 주요산물은 금ㆍ은ㆍ동으로 연간 총 생산량이 금 400kg, 은 2670kg 동180톤에 이르는 굴지의 광산이었으나 1975년 폐광됐다. 

그리고 다시 조용한 어촌마을로 돌아온 초남마을. 광양읍의 가장 남쪽 동서천 하구에 위치해 있으면서 풍부한 어족자원을 자랑하던 초남마을은 인근에 세풍 간척지가 만들어 지면서 농업과 어업이 함께 균형을 이루며 풍요와 인정이 넘치는 마을로 거듭났다.

마을과 갯벌을 단절하고 있는 초남 산단.

그러나 마을의 풍요와 평화는 오래가질 못했다. 90년대에 접어들며 마을 앞이 매립돼 초남산단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또 광양제철소가 가동되면서 마을 입구엔 철도가 놓여 마을과 바다를 단절시켰다. 주민들은 산업화와 개발 앞에 황금어장인 바다를 내주고 공단과 철도, 도로 등 주민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과는 무관한 주변환경의 변화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초남마을의 변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을 앞을 지나는 철도는 복선화 공사를 마쳤고, 마을 뒤쪽엔 국도2호선 우회도로가, 또 초남산단 위쪽엔 제2산단이 조성 중에 있어 갈수록 주민들의 삶터를 옭아매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선 초남 산단의 공해로 인한 마을피해까지 이어져 주민들은 이래저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현재 초남산단에 입주해 있는 업체는 조립금속과 1차 금속, 기계장비, 석유화학 등 31개사가 입주해 있다. 마을 소개에 나선 박노훈 씨는 “당초 초난산단엔 조립금속 업체만 유치키로 했으나, 분양이 잘 이뤄지지 않자 주민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아무 공장이나 들어오게 했다”며 “여러 업체가 들어와 산업이 활성화 되는 것은 동의하지만 최소한의 관리는 해줘야 함에도 너무 관리가 엉망이다”고 하소연 했다.

그는 “오히려 입주업체 직원들이 초남마을 사람들은 왜 아무 말도 않고 저렇게 살고 있나 라고 할 정도다”며 “6백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지금은 마을 이주를 고민해야할 처지”라고 한숨지었다.

황금어장과 금광. 그러나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환경변화로 과거의 영화를 뒤로하고 힘들어 하는 초남마을. 광산에 쓰레기 매립장, 분뇨처리장, 산단 등 가장 악조건을 인내하며 살아온 마을. “세상은 초남마을에 늘 아픔만 줬다”는 마을 주민들의 서운함을 달랠 길이 마련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