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원망하다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원망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6.21 09:21
  • 호수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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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24>


“대장부가 처세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며,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구나.” 민족의 이름으로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처형하기 위하여 합이빈(哈爾賓,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가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영웅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위기의 시대, 피할 수 없는 나라의 위기 앞에서 매천의 마음속에선 어떤 다짐과 생각들이 오가고 있었을까?

매천, 창강을 만나러 상경하다

1909년 여름, 을사조약 체결 전에 중국 회남으로 망명 갔던 벗 김택영이 잠시 귀국하였다. 김택영은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술할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피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조선에서는 집필이 어려웠다. 중국 망명 후 작업을 하려했으나 사료가 없어 힘들었다. 마침 윤택영과 이재곤 등으로부터 여비 지원을 받아 사료 수집 차 귀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벼슬자리를 탐하여 귀국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 해 봄에 김택영이 중국에서 매천에게 편지를 보내오기를 “가을에 귀국하려니 가서 필히 만나자.”고 하였다. 매천은 가을을 기다려 서울로 달려갔으나, 김택영은 이미 중국으로 가버리고 보고 싶은 벗의 자취만 가을바람에 휑뎅그렁하니 뒹굴고 있었다.
太息滄江不可從 크게 탄식해도 창강을 가히 좇지 못하고 扁舟一夜飛龍 일엽편주에 용을 타고 하루 밤 나를 뿐이네…我已灰心忘禹域 나는 이미 중국 땅에 대한 유혹을 잊었는데 君應彈淚向箕封 그대는 응당 조선을 향하여 눈물 흘리겠지

창강은 김택영의 호이다. 친구를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매천의 시다. 매천도 한때 중국에 대한 동경을 품고 김택영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가려고 준비를 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잊었다. 오직 중국에서 고국을 그리워할 친구가 보고 싶을 따름이다. 김택영도 매천을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서신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에서 수집해 간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의 편년사(編年史)를 서술할 계획임을 전해왔다.

실제로 김택영은 이때 수집해 간 안종화가 편찬한『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와 매천 사후에 구한『매천야록』등의 책을 참고하여, 조선 건국부터 멸망에 이르는 조선 시대사를 정리한『한사경(韓史?)』6권을 1918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에 의해 일제시대에『매천야록』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졌다.

머지않아 나 역시 이건창을 따르리라

이건창을 조상하기 위해 상경한 이후 10여 년 만에 와보는 서울은 많이 변해 있었다. 남산에 올라서서 서울을 굽어보니 망국의 기운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예로부터 나라 망하는 일은 붕어가 목 내미는 것처럼 많았으니, 분명 나라 망해도 슬퍼하지 않으리라”고 미리 다짐까지 하였다. 매천의 문인이었던 김상국이 쓴, 「매천선생 묘지명」에는, 이때 매천이 “나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 아리라,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것을 원망한다.”라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매천은 울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을 찾아 강화도 사곡으로 갔다. 사방에 어둠이 내릴 때쯤 이건승의 집에 도착하니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하고 큰 소리로 “누구시냐?”고 물었다. 그러다 매천임을 알고는 미처 신발도 신지 못하고 넘어질듯 달려 나와 손을 잡으며 반가워하였다. 두 사람은 부드러운 고기 안주와 향기로운 술로 그날 밤 마음껏 회포를 풀었다. 매천은 마음으로 주는 음식이어서 “마시고 씹음이 참으로 욕심이 아니었다.”고 표현하였다.

다음날 지란지교(芝蘭之交)를 나누었던 이건창의 무덤을 찾아갔다. 1898년에 이건창이 죽었으니 벌써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한 줌의 흙이 되어버린 친구의 무덤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一紀云亡慟 12년 동안 그대 죽음을 통곡했는데 秋山已短墳 이제 가을 산 한 줌의 흙이 되었구려… 無庸悲獨 무덤 속 혼자 누워 외롭다 말 것이 在日已離 머지않아 나 역시 그대를 따르리라

머지않아 매천 본인도 이건창의 곁으로 갈테니, 무덤 속 이건창에게 “홀로 누워 있어 외롭다 하지 말라.”고 넋두리하듯 이야기하고 있다. 매천이 이미 삶을 마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강화에서 며칠을 쉰 매천은 9월 초순(음력), 서울에 사는 정만조의 초대를 받아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때 서울의 천연당 사진관에서 자신의 ‘영정(影幀)’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1년 후 매천의 순절이 순간의 감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 이등박문을 사살하다

매천이 서울에 머무르고 있을 즈음,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합이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천야록』에는 그 사건의 전모가 잘 기록되어 있다.
이등박문은 합이빈에 도착하여 러시아 고관과 만날 계획이었다. 이등박문이 막 기차에서 내렸을 때, 안중근은 아국 병사들과 섞여 있다가 권총을 연발하여 세 발을 명중시키니 이등박문이 쓰러졌다. 그를 병원으로 옮겼으나 30분 만에 죽었다…이 소식이 서울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감히 통쾌하다고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으나, 모두의 어깨가 들썩하였으며 저마다 깊숙한 골방에서 술을 마시면서 서로 축하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의 쾌거를 전해 듣고 서로 축하하였다. 비록 그 통쾌함을 소리 내어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조용히 축배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은 이등박문을 ‘조선을 근대화한 자치식민지로 만들려고 구상했던 평화론자’로 떠받들고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 그는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조선 통감을 지내며 식민지 지배의 길을 닦은 침략의 원흉’일 뿐이었다. 그를 처단한 안중근은 국망의 시대에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영웅이었다.

그 순간에도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매국노들은 즉시 대련(大連)으로 가서 이등박문을 조문하였으며, 순종은 친히 통감부에 가서 조문하였다. 그리고 이등박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제전비(祭奠費) 3만원을 하사하였다. 유족에게는 부의금 10만원을 전달했다. 또 이학재 등은 이등박문의 송덕비와 동상을 세우자고 건의하였는데, 오히려 일본인들이 그만두도록 하였다고 한다. 신녕 군수 이종국은 이등박문 추도회를 만들어 다음과 같이 큰 소리 쳤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