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영, 문장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다
김택영, 문장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8.16 09:25
  • 호수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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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31>

매천은 「절명시」에서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힘들구나(難作人間識字人).”라고, 지식인의 사명을 다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음을 고백하였다. 특히 망망이라는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구한말의 3대 시인으로 불렸던 매천 황현과 그의 벗들인 영재 이건창과 창강 김택영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대를 고민하였던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여기서는 그 셋 중 가장 먼저 태어나 가장 나중까지 살았던 창강 김택영이 영재 이건창 ? 매천 황현과 동고동락하며 험난한 시대를 헤쳐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젊은 시절, 세 번의 운명적 만남을 가지다

1850년, 김택영은 그의 선조들이 고려 이후 대대로 살았던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과거 공부에 전념하여 17세에 성균 진사시의 초시에 입격됨으로써 시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후 고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시와 문장을 익히는데 전력하여, 23세가 되어서는 평양·금강산 등지를 유람하며 빼어난 시문을 남길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

이러한 탄탄한 문학적 능력을 바탕으로 김택영은 그의 일생에서 첫 번째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1874년 25살이 된 김택영이 두 살 아래의 이건창을 서울에서 만난 것이다. 이미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친 이건창의 글은 당시 벼슬하는 사람 가운데서는 으뜸이었다. 김택영은 그로부터 인정을 받고 벗이 되면서 한양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880년 이건창을 만나기 위해 광양에서 상경한 매천 황현과 두 번째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미 서로의 시(詩)를 통하여 그 이름을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상대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김택영은 그 해에만 매천을 주제로 <천마산에 유람 가는 매천 황현을 보내며(送黃梅泉雲卿 玹 遊天磨山)>와 <황매천을 단발령에서 본 것을 회상하여 화답하노라(酬黃梅泉斷髮嶺見憶之作)>는 두 편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매천이 먼저 세상을 뜨는 30년 동안 인연을 이어갔으며, 매천 사후에도 김택영은 매천의 문집 간행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김윤식(金允植)의 추천으로 1882년 임오군란 때 서울에 들어온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건(張騫)을 소개받은 것은 그 세 번째 운명적 만남이었다. 이때 장건은 그의 시문을 보고 “창강의 시를 동방에서 본다. 그는 걸출한 시인이며 그를 초과할 사람은 없다.”라고 격찬하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김택영이 중국으로 망명 갔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처럼 김택영은 젊은 시절 자신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3명의 인물과 만남을 가졌지만, 김택영의 인생은 잘 풀리는 편이 아니었다. 17세부터 서울과 시골에서 초시에 합격한 것만 다섯 번이었으나, 매번 최종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벼슬살이에 나가지 못하였다. 30세 때는 첫 부인 왕씨와 사별하였다.

188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국도 어수선하였다. 구식군인들의 폭동인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일본은 이때의 피해를 구실로 제물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인천항의 조계설정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내우외환으로 울적해진 김택영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어떤 날은 술 300잔을 한꺼번에 마시기도 하였다.

『숭양기구전』을 쓰면서 마음을 추스르다

김택영은 어수선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1884년 개성 근처의 고덕리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서경덕을 비롯한 개성 출신의 유명한 인물 60여 명의 전기를 쓰기 시작하여 1년 만에 작업을 마쳤다. 이 책이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이다. 절친한 벗 이건창이 이 책의 발문을 썼다.

대개 숭양의 기구들이 이처럼 어질고 이처럼 많은데도, 세상에서 역사를 논하는 자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소호생(김택영의 호)이 있어 그들을 전했거늘 사람들은 또한 그가 사사로이 위했다고 의심하고 있으니, 아아! 이는 300년 동안 나라 사관들의 잘못이지 소호생의 허물은 아니다.

사람들은 김택영이 『숭양기구전』을 쓴 것을 두고 ‘자기 고향을 위하는 사사로운 일’이라고 비난하였지만, 이건창은 역사 기술의 뛰어난 재주를 가진 그가 정식 사관이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위와 같이 발문을 쓴 것이다. 한편, 『매천야록』에도 『숭양기구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용직은 이색의 후손인데, 당초 정인지가 『고려사』를 편찬할 때 이색이 불교에 아첨한 일들을 모두 그 열전에 실었다. 근래에 김택영이 『숭양기구전』을 찬술하면서 그 글을 인용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용직이 크게 노하여 상소를 통해 판명받고자 하였다. 김택영은 그들의 세력이 왕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고쳐 쓰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자책하여 자신이 맡고 있던 편집국의 일을 그만 두었다.

구한말에 친일과 항일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권력을 누렸던 이용직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뜯어고치는 장면이다. 이 일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김택영은 관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용직은 『고려사』를 고치자고 상소하였다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은 김택영을 두고
하는 말이다

1891년 봄, 김택영은 42세가 되어서야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 진사가 되었다. 17세부터 초시에 입격한 것만 다섯 번임을 안 시험관 조강하가 발탁해 준 것이었다. 김택영의 부친 김익복은 묘당에, “내 평생 가장 기쁜 것은 너의 이름(名)을 이룬 것”이라 고하면서 실성하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에게 자식 잘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김택영 자신도 문장을 한 지 40년 만에 미명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시를 지었다.

不思將相不思仙 장상도 신선도 생각지 않고 傲兀文章四十年 애오라지 문장한지 40년 今日微名猶是幸 오늘 작은 이름도 천만다행 何曾辛苦事懷鉛 어떠한 고난도 견디어 이겨내리

비록 불혹의 나이를 넘겨 겨우 진사가 되었지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894년 관제 개편 때, 영의정 김홍집이 그의 『숭양기구전』을 보고 ‘사관(史官)이 될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여 편사국 주사(編史局 主事)로 임명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음해 중추원 참서관 겸 내각 참서관으로 승진되었다가, 이어서 내각(옛 의정부) 기록국 사적과장(史籍課長)을 겸하게 되었다. 1896년에는 학부대신 신기선이 저작한 책에 서문을 써주었는데, 그 책의 기독교 배척 내용을 서양인들이 문제 삼아 결국 신기선도, 김택영도 사직하였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