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구례의 개성 왕씨 3대와 교유하다
매천, 구례의 개성 왕씨 3대와 교유하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8.23 09:39
  • 호수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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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32>

매천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집중도가 높은 집안은 구례 광의면 천변마을의 개성 왕씨였다. 매천의 스승인 왕석보와 그의 세 아들 사각 · 사천 · 사찬과 그의 손자 수환 · 경환과 3대에 걸쳐 스승으로 친구로 제자로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였다. 왕석보의 딸은 매천의 백부 황흠묵의 부인으로, 매천이 믿고 따르던 백모였다. 곧 스승 왕석보는 매천의 사돈어른이기도 하였다.

매천, 10대 초반에 왕석보를 사사하다

앞장에서 얘기한 것처럼, 구례의 개성 왕씨는 정유재란 때 석주관 전투에서 왕득인이 장렬히 전사하면서 명문가가 되었다. 왕석보는 선조의 절개와 지조를 이어받아 평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지리산 자락에 칩거한 학자이자 시인이었다. 매천은 11세부터 14세까지 광양에서 구례를 오가며 왕석보를 사사하였다. 1891년 정월 초하루, 매천은 스승이 돌아가신 지 20여 년 만에 시집을 묶은 후 서문(川社詩稿序)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호남 동쪽에 봉성현(구례)이 있으니, 전도 중에서 탄환(彈丸)만한 작은 고을이다. 천사 왕선생이 이 고장에서 태어난 이후로 전도가 봉성을 시향(詩鄕)으로 추켜올렸다. 이제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십여 년에 선생을 추종하는 시파(時派)의 흐름이 점점 넓어져 차차 작가의 대열에 오르니, 선생 같은 분은 한 지방의 풍기에 관계되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

스승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큰 뜻을 삭이면서 늙도록 시나 읊은 것을 애통해하며 스승의 시집을 묶었다. 예로부터 호남은 시향으로 일컬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구례가 시향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스승 왕석보의 시에 힘입은 바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왕석보의 아들,
‘왕씨삼지’는 매천의 스승이자 벗이었다

시인으로서의 왕석보의 명성은 그의 세 아들에게 오롯이 계승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세 아들의 자(字)인 임지(任之)·칙지(則之)·찬지(贊之)를 합하여 ‘왕씨삼지(王氏三之)’라 부를 정도로 모두 학문에 뛰어나고 시에 능하였다.

그중 장남 왕사각은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나 향시를 휩쓸었으나 시국이 날로 그릇되어 가자 과거에 대한 뜻을 접고 낙향하여 구례 간전면 오봉산에 칩거하였다. 매천은 어릴 때부터 왕사각을 ‘어른’이라 부르며 거의 30여 년에 걸친 사제관계를 유지하였다. 매천 32세 되던 해 구례 만수동으로 이주한 것도 바로 스승 왕사각을 찾아간 것이었다. 매천은 훗날 그의 장남 암현도 스승에게 부탁하여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봉주선생시집서(鳳洲先生詩集序」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 고을에 왕봉주(왕사각의 호) 선생이 계셨는데 시를 한 지 30년이 되었으며 근체시에 더욱 뛰어났다. …… 늙고 궁하여 요사이는 오봉산 중에서 시를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고 있다. 내가 언젠가 가서 뵈옵고 밤에 함께 자는데, 촛불을 가져오니 시중드는 사람에게 명하여 내 시를 쓰라 하시고 조금 있다 또 불러서 쓰라 하셨다. 이같이 하기를 세 번인데 모두가 근체시였다. 그리고 세 편을 잠깐 사이에 지으니, 어찌 그리 민첩할까?

뛰어난 시재를 지닌 스승이었지만 시대의 혼란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드날리지 못하고 시를 가르치며 궁하게 살 수밖에 없었음을 통탄스러워했다. 실제로 당시 왕사각은 책을 팔아서 쌀을 사들여야할 정도로 궁핍하게 살고 있었다. 애년(艾年)의 나이가 된 왕사각은 번민하여 머리가 벗겨지고 피골이 상접하여도 날마다 시를 고쳐지으며 자존을 지켰다.

매천은 왕석보의 차남인 사천, 삼남인 사찬과도 평생 문우로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유람을 좋아하였던 왕사천은 순천에서 운영하던 약국을 그만두고 산천을 노닐었으며, 이때 경성의 강위와도 교분을 맺었다. 1878년 김택영이 지리산 자락으로 여행하며 왕사천을 찾아온 것도 강위의 소개 덕택이었다. 이때 왕사천은 매천의 종형 황담의 집으로 김택영을 안내해서 매천시를 소개하였다.

한편 왕사찬은 왕씨 일가 중 가장 뛰어난 시인이었다. 송시(宋詩)에 기반을 둔 매천과 당시(唐詩)에 바탕한 왕사찬은 시론에 관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매천은 왕사찬을 영남 우도의 성혜영, 호남 우도의 이정직과 함께 남방의 삼대 시인으로 인정하였다. 1900년 <세밑에 모든 사람을 생각하며 지음(歲暮懷人諸作)>이란 그리운 벗 20명을 노래하는 연작시에서 매천은 ‘소천 왕사찬’을 이렇게 기억하였다.

憶我舞勺年 기억해 보면 나는 13세였는데 君已滿鏡 그대의 수염은 이미 거울에 가득하였고 追隨三紀餘 지금까지 좇아 따르기 36여 년에 差差雁行幷 여러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듯하였다 交在師友間 사귐은 스승과 벗 사이에 있었고 情摯頗簡敬 정은 도타워 자못 책을 공경하는 듯하였네

매천은 9살 연상의 왕사찬을 때로는 스승으로 존경하고, 때로는 벗으로 사귀었다. 두 사람은 망년지우(忘年之友)가 되어 한 달이 멀다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당연히 집안일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위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매천은 왕사찬을 두고 “처자식이 성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는 시로서 운명을 삼으리.”라고 읊었다. 매천은 1906년에 쓴「제소천시권후(題小川詩卷後)」에서 “우리들 선배 중에 근체를 잘한다고 일컬어지는 이가 혹 있다. 그러나 옛 것을 옳게 배웠다고 기릴 만한 분은 소천이 있을 뿐이다.”라고 왕사찬의 시적 재능을 격찬하였다.

왕석보의 손자와 증손자,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

구례 왕씨 일가와 매천과의 교유는 왕석보 네 부자에 이어 손자 대까지 대물림하며 지속되었다. 즉 장남 왕사각의 두 아들 왕수환과 왕경환은 만수동의 구안실에서 매천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매천은 “여장(汝章, 왕수환의 자)은 얼굴이 못생겼으나 성격은 굳세며, 재주는 적으나 기질이 맑아서 일의 불의(不義)를 알면 하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인데 아깝구나. 가난하여 자급하지 못하고 운명이 궁하네.”라고 하였다. 왕수환은 매천의 뜻을 받들어 호양학교의 교사와 2대 교장을 역임하며 ‘민족 자강론’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다.

자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육에 힘써야 하고, 산업을 넉넉하게 해야 하며, 기예를 정밀하게 하면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경쟁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