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의 교유는 좁지만 웅숭깊다
매천의 교유는 좁지만 웅숭깊다
  • 광양뉴스
  • 승인 2010.08.30 09:25
  • 호수 37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비, 매천 황현의 삶과 꿈<33>

1900년 한 해가 저물 무렵, 벗들이 무척이나 그리웠던 매천은 평생 잊지 못할 스무 명 벗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며 시를 지었다. 바로 <세밑에 여러 사람을 생각하며 지음(歲暮懷人諸作)>이란 시다. 이미 저세상으로 간 이건창은 빠졌지만, 매천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평생지기들은 거의 다 포함되었다.
서울을 드나들 때 사귀었던 친구들, 남녘에서 함께 공부하며 노닐었던 친구들, 산 속 사찰을 드나들 때 만났던 승려 등 평생을 두고 사귄 친구들이었다. 여기서는 매천의 영 · 호남 친구들과 승려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혜영은 강위의 천추에 남을 제자다

성혜영(成蕙永, 1844~ ? )은 경남 하동 수촌리 출신이다. 1876년 가을, 그는 광양 석사리의 석현정사(石峴精舍)를 방문하여 매천을 처음 만났다. 그는 매천에게 중앙시단의 동향을 알려주며 그의 스승이자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당대 명문장가 강위(姜瑋, 1820~1884)를 소개해 주었다. 『매천전집』에 나오는 글이다.

중양절이 5~6일이 지났을 때, 하동 진암 사람 성혜영이 찾아왔다. 자는 채오(彩悟)이고 호는 남파(南坡)이다. 호남의 바닷가에서 일찍이 소문을 들었던 사람이다. 금년 여름 서울로 유학하여 추금 강위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근체시를 주로 익혔다고 한다. 나를 위하여 추금의 시 수백 편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과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 여러 명가들의 시를 말해주었는데, 모두 즐길 만하고 외워둘 만했다. 나는 추금에 대하여 들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함께 숙박하며 시를 서로 주고받았다.

1878년, 매천은 성혜영의 소개를 받아 상경하여 강위를 만났으며, 이번에는 강위를 통하여 신헌 · 신정희 부자와 김택영 · 이건창 등의 평생지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매천과 성혜영은 가끔은 만남을 통해, 때로는 편지로 우정을 나누었다. 어느 날 성혜영이 매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백년 통계를 내보면 만남은 적고 이별은 많습니다. 그런데도 만났을 적에 오히려 다 즐기지 못하고 이별한 뒤에야 다시 그리워하는 것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는 인정인가 봅니다. 이 때문에 내가 선생에게 잠깐이라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였던 것은 어찌 한갓 그 문장만 부러워하고 그 기개와 절조만 숭상해서였겠습니까? 또 일종의 뜻의 향하는 바가 마음속에 젖어서 밖으로 나타난 때문입니다.

마치 금방 보고도 돌아서면 또 보고 싶은 연인에게 보낸 편지 같다.
두 사람이 진실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음을 엿볼 수 있다. 훗날 매천은 성혜영에게 칠의각(七義閣, 구례에 있는 정유재란 때 전사한 칠의사를 모신 제각)에 관한 글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고, 성혜영은 <칠의각 원운(原韻)>을 지어서 보내기도 하였다. 매천은 <세밑에 여러 사람을 생각하며 지음>에서, “사해의 고환당 강위는 천추에 훌륭한 제자를 얻었네.”라고 성혜영을 극찬하였다.

운조루의 5대 주인 유제양과 교유하다

유제양(柳濟陽, 1846~1922)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雲鳥樓)의 5대 주인이다. 운조루는 금거북이가 진흙 속으로 들어간다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 명당에 자리잡은 고택이다. 그러나 그 터보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명인이었다.

1776년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가 운조루를 지은 이후, 그와 그의 후손들은 ‘타인능해(他人能解, 누구나 열 수 있음)’ 글씨가 새겨진 쌀뒤주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누구나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베풀었다. 그 덕에 동학 농민 운동, 항일 의병, 빨치산, 6 ? 25 전쟁의 중심에 위치했는데도 오늘날까지 고택을 보존할 수 있었다. ‘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남아돌아가는 경사가 있기 마련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유제양도 든든한 재력과 넉넉한 인심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는 왕석보의 4부자와 매천을 비롯한 구례의 뛰어난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통하여 사우관계를 유지하였다. 평생을 오로지 시에 뜻을 두고 매일 당 · 송시를 외우고 그 운에 차운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는데 몇 십 년 동안 게으른 적이 없었다.
시적 재능 또한 뛰어나서 ‘일기회(一器會)’ 등의 시회를 조직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가 평생 남긴 시는 만여 수에 달한다고 한다. 1900년 매천은 <세밑에 여러 사람을 생각하며 지음>에서 그에 관한 시를 남겼다.

常尋有花園 항상 찾을 꽃동산이 있고 不飮無客酒 손님 없이 술을 마시지 않았네 唐詩寫小本 당시를 작은 책자에 베껴놓고 一篇長在手 시 한편이 항상 손위에 있네 滿壁佳山水 사방 벽에는 좋은 산수화가 있어서 臥游終吾壽 누워서 유람하며 생애를 마치려하네 我每見之驚 나는 매번 이것을 보고 놀라서 問否於古有 옛날에도 이런 사람 있었던가 물어보네

구례의 대표적 지주였던 유제양의 여유로운 생활과 시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와 매천의 끈끈한 인연은 매천 사후에도 지속되었다. 매천시파는 수시로 운조루를 방문하여 시문을 읊고, 매천을 추모하는 일을 함께 도모하였다. 운조루는 시인 묵객들의 쉼터요, 재충전의 공간이었다.

매천은 봉황, 이정직은 난조(鸞鳥)라 불리다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은 전북 김제에서 출생한 시인이자 문장가이다. 호남권에서 매천 황현, 해학 이기와 함께 ‘호남삼걸’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정직은 1895년과 1897년 두 차례에 걸친 구례 방문을 통하여 매천과 구례의 문인들을 만난 후 소감을 시로 썼다.

不將天性讓前賢 장차 천성이 선현들에 밀리지 않아 妙透門來玄又玄 묘한 경지에 이르니 오묘하고도 오묘하네 我與伯曾虛老大 나는 백증(이기의 자)과 함께 헛되이 늙었는데 江南獨有黃梅泉 강남에는 홀로 황매천이 있네

이정직이 매천을 얼마나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시다.
물론 매천도 1897년 음력 4월 구례 만수동 구안실에서 만났을 때, “인재가 마침내 똑같지 않으니 서까래를 가지고 들보를 본받을 수 없네.”라 하여, 자신을 서까래에 이정직을 들보에 비유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두 사람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은 매천을 ‘봉황’이라 하고, 이정직을 ‘난조(鸞鳥)’라 하였다. 봉황도 난조도 동양의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운 새이다. 두 사람 모두 비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전문은 광양신문 홈페이지http://www.gynet.co.kr에서
볼수 있습니다>
이은철(광양제철중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