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통로
축복의 통로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09:46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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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렬 - 마하나임 커뮤니티 교회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고향을 찾는 이들이 돌아가면서 차안 가득히 바리바리 싸 가는게 있다. 나물, 호박, 찬거리, 된장, 고추장, 무, 김치.... 수 일동안 모아둔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겨진 그런 것들이다. 집에 가서 풀어보면서 아마도 많이들 가슴이 찡했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도시에서 몇 푼 주지 않으면 더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음에도 자식들 생각에 그러한 것들 하나하나 마련하기 위해서 멀리 산천을 다니고 수일을 밤을 새우고 피곤한 몸 간신히 부축하여 만들었을 그 음식 하나하나에 담긴 어머니의 정성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진정 위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아낌없는 베품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 작은 체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자녀들을 향해서 쏟아 내신다. 이제는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그 곱던 눈가에 주름이 많아 더 짜낼 사랑이 없을 것만 같은데 오히려 더 진한 사랑이 느껴진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부어 주시므로 어머니는 더 큰 사랑을 안고 계신 사랑의 부자가 되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진정한 부자로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을 향해 가장 크게 분노하셨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축복의 통로 역할을 잊고서 오히려 이기적인 선민의식으로 통로를 막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계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셔서 특별한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은 '통로'로서의 역할을 잊은 채 모두 다 '축복' 그 자체에만 매이고 만다. 급기야 그러한 축복이 하늘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잘나고 잘해서 얻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며 자고(自高;스스로 높임)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의 밥그릇을 흩으시고 때로는 이방의 나라들이 쳐들어와서 민족을 흩어서 그러한 통로로서의 역할을 상기시키지만 기어이 나라가 다 멸망할 때! 까지도 각성하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맡겼던 축복의 통로로서의 역할은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요즘 욕을 먹는 한국교회의 모습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스라엘과 같은 이기적 선민의식으로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모습" 즉 받은 축복을 외부로 나누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망각한 것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나누지 않으면 썩는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그것을 다시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나누지 않아서 오히려 있는 축복의 분배 문제로 욕심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면류관에 눈이 멀어서 인류의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 위해 가장 큰 고난의 대가를 치룬 예수님의 뜻은 저만치 던져버린 오늘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을까?

현재 전 세계적인 빈곤과 기아의 문제는 자원부족이 아니라 분배의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한국사회의 빈부의 격차가 자꾸만 커져가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만일 자신이 받은 축복이 자신만을 위해서 누리라고 허락한 것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임을 기억하고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지금 우리사회가 지금처럼 이렇게 어려울까? 부자가 삼 사대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통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느냐에 따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진정한 부자는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얼마나 그것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따라 결정 되어 진다. 그래서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인 것이다. 많은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으로만 나누어도 그는 진정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억지로 봇물이 터지기 전에 이미 받은 것을 아낌없이 폭포수처럼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바란다.
 

입력 : 2005년 0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