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나라 역사에서 본 문해운동
[칼럼] 우리나라 역사에서 본 문해운동
  • 광양뉴스
  • 승인 2012.09.03 09:28
  • 호수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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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애 광양시 평생학습 프로그램 강사
우리나라 문해운동 시작은 훈민정음 이전에 한자를 바탕으로 한 이두, 구결, 향찰과 처용가 등의 향가가 서민들에게 널리 불러졌다는 기록으로 그 글자를 서민들에게 가르친 문해교육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
공식화 된 문자가 없었던 시절 정확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자료들에 의해 추측할 뿐이다.

그 후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고 그 서원을 살펴보면 오늘날 문해교육의 이념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간 무시되던 일반 백성, 천민, 노비들에게까지 글자를 깨우치게 하려고 그에 걸 맞는 정책사용” 이라고 씌어져 있다, 쉬운 교육을 위한 <삼각행실도>를 그려 붙이고 문학을 익히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중국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시를 한글로 번역해 <두시언해>를 번역한 시집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사고나 병이 나서 급할 때 구급방법을 한글로 풀이해서 만든 <구급방언해>등 문맹인들을 위한 배려가 우리 삶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연산군의 국문 사용 금지 조치에 억압을 받게 되었지만 한글은 오히려 민중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끈질 지게  명맥을 유지 했던 건 민중 속에서 문해운동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개화기로 들어가 보면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 한글신문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모두 한글로 쓰게 된 것은 “남·여,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 목적이다. 민중을 위한 문해교육과 계몽 사명을 띠고 있는 독립신문은 반민족 친일지와 반민족적 언론에 대해서는 일일이 비판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문맹퇴치 운동은 조선어학회는 표준말의 보급과 일반 민중을 위한 문맹타파 등의 강습을 실시하였고, 조선일보의 국문보급 운동에서는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표어⇒농어촌의 문자 보급 운동 전개” 등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또한 동아일보의 브나브로 운동이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학생들을 동원, 각 지방에 흩어져 마을마다 야학을 개설해 문맹자에게 한글과 위생지식을 가르치고, 음악, 연극, 오락 등을 지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이광수 ‘흙’, 심훈 ‘상록수’ 소설 속에서도 그 시대를 잘 반영해 놓았다.

해방이후 국문보급 사업은 민주주의 건설의 필수조건으로서 문맹퇴치를 주장하였으며 문교부에 성인교육국을 설치하였고, 공민학교의 설립과 운영 등 해방 후의 문해운동에 커다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본 문해운동은 민족의식을 고취 시켜주었으며 나라를 재건하는데도 커다란 공헌을 하
였다고 한다.

이렇듯 문해교육은 단순한 문맹퇴치 교육만이 아니다. 민족의식과 개인의 의식함양 및 자아발견 그리고 세상을 향한 당당한 나의 도전이다. 또한 문해교육은 제도권의 속의 교육이 아니다.

문해운동이라는 과업의 교육임을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확연히 드러나 있다.
평생학습과 고학력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세상 밖으로 드러내 놓지 못한 비문해자들에게 문해운동이 확산되어 모두가 교육의 권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문맹퇴치운동가 다카노 마사오(72)선생님은 “배움에 있어 결코 시기란 없으며 늦은 나이에도 배움을 갖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배움이다.”라고 말했다. 그 진정한 배움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 문해운동이요 우리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