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시절
나의 어린시절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4 14:11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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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현 태 / 재경청년회장
내가 태어난 곳은 광양시 골약동 황곡이라는 마을이다.

가난한 집안의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고향에서 보냈지만 중학교는 순천에서 고등학교는 광주에서 그리고 대학은 부산에서 다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워야 하는 날도 많았건만 오로지 자식교육을 위한 부모님의 열성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셨다. 아니 위대하시다.

자라면서 늘 배고프고 형편이 어려워서인지 난 가난이 무척 싫었다. 고향을 떠나 젊음을 담보로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지독히도 힘들었던 시절. 가난과 타협하지 못하고 타향살이 하는 설움은 정말 힘겹기만하다. 특히 명절날 돈이 없어서 고향에 가지 못하는 설움은 더 없이 크다. 몇 년을 객지에서 부모님께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함에 가슴 아프고 그리워지는 고향집 생각으로 그 시절 명절은 아픈 기억뿐이다.

오늘 난 무척이나 배고팠던 어린시절이 생각나 점심시간에 보리밥집을 찾았다. 몇 가지 안되는 메뉴에 허름한 밥집이지만 어머니가 생각 날때마다 종종 들르는 곳이다. 내 어린시절, 그땐 하얀쌀밥은 꿈도 못꾸었기에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는 소원을 빌기도 했었다. 그 시절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끼니를 걱정하고 하루하루 사는게 투쟁의 연속이었고 웬만한 집이 다 대식구여서 먹고 사는게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어쩌다 친구들과 뒷산에 땔나무를 하러가면 이름모를 나무에 열려있는 열매들은 우리들의 간식거리였다. 들판의 이름모를 풀들은 어머니의 반찬거리였기에 가난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넉넉했다.

문명의 이기로 수질오염, 대기오염, 토양이 오염되어 건강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요즘. 되돌아보니 그때 그시절 모든것이 그리 넉넉지않았던 시절에 우린 이미 웰빙아닌 웰빙을 하고 있었다. 병풍처럼 둘러싼 구봉산의 줄기로 흐르는 약수물을 식수로 마시며 다양한 약초로 채워진 내 어린시절의 식탁.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웰빙식탁이지 않은가. 우습게도 그때 그 식탁이 유기농야채로 채워진 최고의 식탁이었다니...

몇 가지 산나물에 보리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남자형제들은 지게를 메고 구봉산 넋바위까지 한달음에 올라가 땔나무를 했다.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 부지런히 나무를 해다 뒷마당에 쌓아놓고 나면 쌓인 높이 만큼이나 든든하고 그 해 겨울은 마음도 따뜻하다.

옛날 이야기책에서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잡아 먹지~"하면서 등장하는 산고개 몇 개를 넘어야하는 산골에 살았기에 TV는 꿈도 못꾸었고, 그 흔한 라디오도 없어서 세상 살아가는 정보도 없었다.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하는 읍내에 나가는 버스가 있긴 했지만 차비를 아끼기 위해 지름길로 산을 넘어다녔다. 어머니는 장날이면 무거운 곡식을 바리바리 싸서 머리에 이고 들고 구봉산 줄기를 따라 걸어서 광양읍내 장에 가셨다.

필요한 생필품을 곡식과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서이다. 해질녘 어머니는 장에 가실때처럼 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들고 돌아오신다. 과연 장에서 무엇을 사오실까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우리는 보따리 속에서 검정고무신을 발견하고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었다.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요세 아이들은 이해 못할 기쁨이다. 여름용 겨울용 할 것 없이 하나 밖에 없는 내 신발이 행여 닳을세라 무척 아껴 신었고, 너무 오래 신어서 찢어지면 하얀 무명실로 꿰매고 또 꿰매서 신었다. 30년 넘게 신발공장 사업을 경영하고 있는 나로서는 어린시절 검정고무신에 깃든 애정과 추억이 경영마인드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꿈을 위해 도전을 하며 난 여러번 좌절도 하고 고뇌도 맛보았다. 그때마다 날 일으켜 세우고 도전과 응전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나의 부모님을 들 수 있다. 풍요속에 빈곤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요즘 사람들의 삶보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살아왔기에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 마음에 늘 그림처럼 그려지는 어린시절의 추억이 담긴 고향이 버팀목처럼 자리하기에 든든했다. 몇 년전 아버지가 별세를 하고 고향엔 어머니께서 홀로 계신다.

고향을 못잊어 같이 사시자는 아들의 부탁에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신다. 도시는 답답하고 꽉막혀서 싫으시단다.

나도 언젠가 내 노후를 고향에서 설계하고 싶다. 대기오염에 하늘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눅눅한 공기로 채워진 이 시끄러운 도시를 떠나서 내 고향집에서 구봉산 바람소리를 친구 삼아 호미랑 괭이를 들고 살진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고 땀흘리리라. 고향은 그리운 내 어머니이기에.
 

입력 : 2005년 01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