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단재 신채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단재 신채호’
  • 광양뉴스
  • 승인 2013.08.18 19:45
  • 호수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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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 로스벵커피아카데미 강사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명언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이 현재는 곧 미래에 투영되기에 현재 우리의 자화상을 은유, 풍자한 느낌이라 교육자로서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금번은 한국 가장 사랑하는 문화 중 하나인 술 문화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술을 먹고 즐기는 데에 있어 지식적인 부분은 중요치 않으나 바르게 즐기며 발전시켜야 될 문화임에는 분명하기에 우리의 생활 문화인 술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알고 즐겼으면 하는 바 이다.

서양과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하여 농경형 식생활이 형성되었고, 농경에서 산출한 곡류에 자연적으로 곰팡이를 번식시킨 누룩을 이용한 술을 담아왔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삼한시대이다.

고구려는 주조기술을 중국과 신라로 전파하였는데 중국에서 곡아주라는 명주를 탄생시켰고 신라에서는 후에 신라주라는 명주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백제는 인번이라는 사람이 일본 응신 천황 때 누룩을 이용한 술 빚는 법을 전함으로써 일본에 술다운 술이 생겼다고 한다. 이 술이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의 사케가 되었고 신라는 삼국 중에 국가의 틀을 가장 늦게 갖추어 술 빚기에서도 가장 낙후되었으나 고구려로부터 양조기술을 전해 받고 이후 국력과 함께 날로 주조기술이 발전하였다.

고려시대는 원나라의 침입으로 현재도 유명한 소주가 유입이 되었다. 이때의 소주는 지금과 다른 형태인 증류식 소주이다. 이 증류식 소주 중에 가장 유명한 소주는 안동소주인데,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한 ‘안동도호부’ 때문이다. 이때 증류주가 유입이 되면서 술 문화 형성,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시대가 시작이 되면서 기존에 술을 빚는 곳이 사찰 이였는데, 숭유억불정책이라는 정책을 펼쳐 불교를 탄압하는 한편 유교사상이 일반 서민들 사이에 뿌리내리게 된다.

유교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와 어른 공경을 뽑을 수 있는데 현재 우리가 주법이라 칭하는 술 마시는 법도도 이때 형성이 된 것이 많다. 술을 직접 빚어 조상께 대접하기 위해 제사용 술을 직접 집에서 빚게 되면서 가양주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가양주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명가에는 명주가 있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으며, 농사일이나 밭일을 하다 중간에 새참을 먹는데 이때 일꾼들을 위한 농주를 빚어 대접함으로써, 힘을 얻게 하고 한 잔 술로 피로를 씻게 하였다. 이 농주가 발전과 변화를 거듭해  현재의 막걸 리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치하기를 겪게 되면서 우리의 전통주들은 설자리를 잃게 되고 일제강점기 시절 1916주세법 창설시 소주를 빚는 제조장의수가 28,416개소나 되었던 것이 1933년경에는 430개소로 대폭도태 되었다. 이때 등장한 소주가 우리가 현재 음용하고 있는 이른바 ‘희석식 소주’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을 하고 일본인의 소유였던 양조업체가 한국인 소유로 되면서 다시 증류식 소주, 우리 고유의 전통주가 등장하나 싶었으나, 6.25전쟁으로 주류제조장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그 후 경재개발 5개년 등 여러 가지 정부시행 정책을 거치면서 ‘한강의 기적’이라 칭해지는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의 술 문화는 아직도 일제강점기 시절에 머물러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듯 이런 뿌리 깊은 역사와 문화를 가진 우리의 전통주 문화를 연구, 발전시켜 세계로 뻗어나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술 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