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1. 다압면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1. 다압면
  • 조동래
  • 승인 2013.08.18 20:07
  • 호수 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운산 등에 업고 섬진강 품에 안은 ‘매화’의 고장

귀향하면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역사문화관 해설을 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우리고장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접하게 되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 광양문화원 방문객 중 광양사람을 면담해보니 의외로 문화와 예술에 관해 적극적이고 관심이 많았다.

우리 문화는 기관이나 단체는 상호 줄탁(茁琢)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새 생명이 깨어날 수가 없는 실정이다.

무정란도 아니면서 깨어날 기미가 없으니 어미혼자 주둥이로 쫀들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가 인근시군에서는 깨어난 병아리가 자라 황금 알을 낳고 있다. 갈 길은 먼데, 세월만 허비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문화예술에 관한 시민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있는지 조명해 보고 싶다.

광양에 인물이 없어지고 기백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에 동감하면서 훼손되고 소멸되어가는 문화재를 찾고, 원로들의 구전문학이 잊어지기 전에 발굴하고자 문화탐방을 결심하게 되었다. 각 읍면동별로 1회씩을 게재할 것이니 12회가 될 것이다.

자료참고는 광양군(읍지,1925년)·광양군지(1983년)·광양시지(2005년)·골약향토지(90. 11.11.)·광양문화유적의 발자취 외 여러 문헌을 참고했음을 부언해 둔다. 참고문헌의 내용을 원용했고 현지를 방문해 실물을 확인하고 원로들의 구전을 청취하여 요약한 것이다. 마지막 회는 시 전체를 대상으로 할 것이다.

귀향하면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역사문화관 해설을 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우리고장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접하게 되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 광양문화원 방문객 중 광양사람을 면담해보니 의외로 문화와 예술에 관해 적극적이고 관심이 많았다. 우리 문화는 기관이나 단체는 상호 줄탁(茁琢)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새 생명이 깨어날 수가 없는 실정이다. 무정란도 아니면서 깨어날 기미가 없으니 어미혼자 주둥이로 쫀들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가 인근시군에서는 깨어난 병아리가 자라 황금 알을 낳고 있다. 갈 길은 먼데, 세월만 허비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문화예술에 관한 시민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있는지 조명해 보고 싶다. 광양에 인물이 없어지고 기백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에 동감하면서 훼손되고 소멸되어가는 문화재를 찾고, 원로들의 구전문학이 잊어지기 전에 발굴하고자 문화탐방을 결심하게 되었다. 각 읍면동별로 1회씩을 게재할 것이니 12회가 될 것이다. 자료참고는 광양군(읍지,1925년)·광양군지(1983년)·광양시지(2005년)·골약향토지(90. 11.11.)·광양문화유적의 발자취 외 여러 문헌을 참고했음을 부언해 둔다. 참고문헌의 내용을 원용했고 현지를 방문해 실물을 확인하고 원로들의 구전을 청취하여 요약한 것이다. 마지막 회는 시 전체를 대상으로 할 것이다.

 

 

※ 사진은 황상보·신영식 작가가 제공한 것임을 밝혀 둔다.

 

섬진강 다슬기 채취장면. 사진 = 황상보

 



지형과 위치

다압면은 광양읍에서 가장멀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에 백운산을 등지고 섬진강 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형성돼 있는 곳이다. 강 건너는 경남 하동으로 그 길이를 같이하고 있다.

서쪽은 능선이 길게 남북으로 뻗어있고 높고 험해 길을 조성하지 못했다. 남쪽은 다압면 답동마을과 진월면 가길마을이 서로 종점이다.

북쪽은 깊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다압면 하천리요 북쪽은 구례군 간전면 하천리라 부르고 있으며 끝점은 한재로 옥룡으로 넘어 갈수 있고 백운산 등산로가 열려있다.

도면상 면단위로는 가장 긴 28Km의 길이로 표기돼 있어 확인해 보니 정확했다. 강의 특성은 평야가 없고 연간 강우량이 가장 많고 유일하게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소재지에서 광양읍 까지는 34㎞떨어져 있으며 가는 길은 험하고 높은 두 고개(매티재·솔티재)가 있어 멀고 불편했으니 광양에 속하면서도 생활권은 하동이 무대였다.

그로인해 광양읍과는 학연·지연이 없으니 인적교류가 소원하고 광양시민이란 의식이 적음은 물론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갖고 있어 보인다. 이곳은 남의 동네처럼 느껴지고 아주 멀게 생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까지는 2개의 재를 넘어 광양에 가는 것은 하루에도 벅찬 길이었다.

육로의 교통편은 왜정 때 신작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강변을 따라 오솔길을 이용했으며 곡선으로 내왕이 불편했다고 전해준다.

광양이나 하동을 가기위해서는 남쪽으로 내려가 원동마을에서 갈라지게 되며 서쪽은 광양읍 방향이고 동쪽은 강 건너면 하동읍이다. 북쪽으로 강변을 따라 가면 구례·곡성·남원으로 갈 수 있으나 멀고 험했다.

해로는 섬진강을 이용해 하동과 남해·여수로 내왕할 수 있었으며 일제 때 하동장날(2·7일)마다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이 있어 편리하게 대도시로 나갈 수 있었다. 섬진교는 1937년 7월에 개통되어 영호남의 소통을 원활하게 했고 물류의 이동을 간편하게 했으며 지금의 대교는 2000년에 준공한 것이다.



역사적 발전과 생활상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석기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 3기가 분산돼 있다. 이 지역은 광양의 역사와 함께 했으며 삼한시대 변한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광양은 백제 근초고왕 때 마로현으로 시작해 통일신라시대 희양현 그리고 고려 때 광양현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조말기인 1895년부터 광양군이 되었으며 그 후 약 백년이 지나 광양시가 될 때까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큰 변동이 적은 지역이었다.

 이곳 지명의 전래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신동국여지승람에 일반 촌락이었으며 특수행정구역 2개소로 명칭은 다사천소(多沙川所, 도사리)와 지암천소(知巖川所, 금천리)라는 지명이 명기돼 있다. 그리고 다압면 섬진(蟾津)지명이 국가 중요문헌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조선조 문종 원년이었다.

숙종 31년 섬진마을에 수군진영인 섬진진(蟾津鎭)을 설치할 때 하동 두치진(豆恥津)이 광양지역에 속하게 되었으나 왜정 때 총독부 령에 따라 두치진은 하동군으로 넘어갔다. 다압면(多鴨面)의 지명은 당시 제일 큰 마을이었던 다사 촌과 압척 촌의 앞 글자를 따서 다압면으로 불렀을 것이라 추정되며 광양현지도(1872년)에 다압면 7개리 명칭이 기록돼 있다.

섬진진이 요충지로 실증된 것은 임진왜란 때인 병신년 윤 8월 14일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새벽에 두치진에 이르니 체찰사 이원익과 부찰사 한효순이 어제 밤에 와 잤다고 한다. 지정된장소로 쫓아가 소촌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고을에 이르다.

지나온 지역이 한 결 같이 쑥대밭 같은 폐허가 되어 그 참상은 목불인견이다. 소식적(지금 당장)으로라도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백성들의 피로를 풀어주어야겠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정유재란 전인데도 광양은 전란의 피해가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살기 좋은 곳으로 부상

다압면은 조선말기 까지는 오지(奧地)로 살기불편한 곳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지리적으로 강을 따라 형성된 곳이며 섬진강은 원래 다사강·사천강·두치강이라 불렀으며 진안군 팔공산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3도 12개 고을을 지나며 남해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이곳에 서식하는 은어·참게는 명물이라 전국의 애호가들이 찾고 있다. 고려 때부터 전래된 것이라 전해지는 차(茶)는 맛과 향이 독특해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정부수립 이후 농어촌 소득사업을 권장했고 전국 각 지에 주산지를 조성하게 되었으며 경전선 개통과 때를 같이하여 밤 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 무렵 다압면 도사리 김오천옹은 이미‘밤마을’을 크게 조성했을 때이며 이로 인해 묘목을 생산해 전국각지로 보급함으로써 유실수 단지조성에 크게 기여한 공으로 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고장의 주된 소득 작목은 차(茶)·밤·매실·배 등이며 배는 강변의 땅이 퇴적된 미세한 사질토라 배수가 잘돼 배생산지로 적합해 조성된 것이다. 네 가지 유실수와 농업소득이 으뜸이라 광양시 지역 중 가장부촌이 되어 살기 좋은 곳이다. 앞으로 섬진강 권역개발로 발전할 여지가 큰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래의 관광지로 기대되는 곳이다. 

다압면은 광양시 전체 호수와 인구수에 비해 1%를 약간 상회하지만 소득을 보장해주는 특산품과 섬진강 명품이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경치 수려한 산과 장수의 기본 조건인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유기농산물의 먹을거리가 풍부해 살기 좋은 고장이다.

주거 집단은 16개 마을로 조성되어있으며 거의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고 지난 6월 29일 섬진강변 자전거길 47Km가 개통되어 섬진강변의 풍치를 만끽하며 달리는 자전거는 시원해 보인다.


유적과 유물이 있는 명소

길을 떠나면서 찾아볼만한 곳으로 전라남도지정문화재인 무등암목조대세지 보살상·섬진진지 석비좌대유물과 유적지로 간주되는 염창 터·금천계곡·기와 터·유배지·평화마을·원(院)·시민휴양소 등을 염두에 두고 포장된 길을 따라 구례 하천리 도장마을(버스종점)에 도착해 건너편에 다압면 하천리 끝자락에 안기복이 독립가구로 거주하는 것을 확인했다.

되돌아 염창마을에 도착해 염창 터를 살펴보니 염창횟집으로 부터 북쪽으로 1백 미터 쯤 떨어진 도로변에 접해있다. 이 창고는 고려시대부터 소금을 보관하고 출납하던 곳이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마을 이름이 염창으로 된 것은 옛날 소금창고가 있어 불러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사료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이곳에 염간(제염 장에서 작업하던 인부)이 34명이나 있었고, 봄가을에는 공납할 물량이 214석이나 보관 관리되었다는 내용을 기록한 게시판이 수립돼 있다.

염창이 이곳에 설치된 유래와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나 지면상 생략한다. 길 아래  배섯거리(선창)가 있으며 이곳으로 소금을 운반했으며 해방 후에도 배가 드나들며 해당 죽(김 생산용 섶)을 실고 도서지방으로 나갔다고 토박이 주민 김귀진이 전해준다.

당시 이곳 창고에 보관했던 소금의 생산지는 노을도소(奴乙道所, 진하면 오사리)와 고지포(古之浦, 골약면 고길)에서 생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오사리 염전은 생산지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길마을 염전은 일제 때 간척사업으로 농토가 조성될 때까지 소금을 생산했으니 5백년이상 이곳에서 소금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광양지역에 근래까지 소금을 생산한 곳은 세풍(도청), 황방(염포),도리(돌아티), 고길(고지포), 금호도·태인도 등 6개소가 있었으나 간척사업과 광양제철소 건설로 염전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동해서 다사마을에 있는 유적지와 유물을 확인한 결과 지석묘 1기가 있고, 유배지 용선암은 조선조 영조 때 문신이던 김성탁(金聖鐸, 본관 의성, 호는 제산)이 제주도로 귀향 갔다가 1738년 7월 이곳으로 이배(移配)되었다.

별세하기 까지 약10년 간 인근의 선비들과 교류하며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다수의 저서와 시문을 남겼다. 용선암은 몇 년 전까지 있었으나 모두사라지고 옛터만 남아있다.

이 마을에 다압중학교가 있고 앞 도로와 접해 있는 섬진강 매화로 1648(다사리 1034-2, 답)호 터에 해방 후까지 기와 굽던 가마 2기가 있었다. 터는 현재 개인소유로 10여 년 전에 주택을 신축해 살고 있으며 기와공장을 운영한 사람은 본동 출신 강윤경으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고 타계할 때까지 고향을 지킨 애향주의자였다.

시간이 촉박해 섬진마을로 들어서 우선 원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 마을은 옛 섬진진(蟾津鎭) 구역 안에 수월정·수월정 유허비·섬진진지 석비좌대·섬진강 유래비·김오천옹 송적비·배맨바위 등이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수월정은 나주목사를 역임한 정섭(鄭渫,설)이 만년을 보냈던 곳으로 정철이 이곳에 와 경치에 반해 수월정기를 썼고 내용은 유허비의 비음에 전해지고 있다. 섬진진지 석비좌대는 수월정 주변에 귀부좌대(龜趺座臺)4기가 정돈되어 있다.

옛날 섬진진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별장들의 공적 비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마을 원로들의 말에 의하면 초동 때 배를 맨 바위 아래서 여름에 자맥질을 할 때 비신을 본 일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전국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청매실 농원’아래 매화기념관을 신축하고 있다. 또한 마을에 용 굿이 있는데, 재액을 막고 소원성취와 평안무사를 비는 무속신앙으로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 신께 제를 올리는 행사였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마지막으로 원동마을에 있는 무등암(쌍계사 말살)지정문화재 제 211호인 불상존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내려와 2000년도 주택 32동을 완공한 평화마을에 둘렀더니 영호남 화합을 다지는 뜻으로 양쪽지역민 반반이 거주하고 있으니 아늑하고 편안함이 서려있는 듯하다.

끝으로 이 지역주민들은 경치가 아름다워 살기 좋은 곳으로 부상하고 있음으로 앞으로는 같은 광양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협조해 주기를 바라는 뜻을 알고 탐방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