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11. 중마동②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11. 중마동②
  • 광양뉴스
  • 승인 2013.12.09 00:23
  • 호수 5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양시청


행정기관이 모인 ‘행정마을’, 신시가지 형성된 ‘오류마을’
중마동 문화유산 … 소가 누워있는 형태 ‘와우마을’

마을의 유물 유적                  

첫 방문지인 중촌마을은 당초 중촌과 용소마을로 이루어졌는데, 광양현지도에 의하면 골약면 중동지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후 행정구역개편으로 골약면 중동리ㆍ용소리ㆍ오류리ㆍ행정리ㆍ불로리ㆍ세동리 내도와 병합하여 골약면 중동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광양제철소 건설과 컨테이너 부두 건설로 인한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도시화로 옛 마을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마을에 첫입촌은 고령 신씨였다고 전해지나, 진양 정씨 12대손인 정대유가 임진왜란 무렵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진주에서 중촌마을로 이주한 후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중마초등학교, 현충탑이 있다. 문화유적은 연자매(硏子, 연자방아이며 32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홍좌(申洪佐, 1978년 마을에 세운 효행비)ㆍ당산제(귀목나무에 30년 전까지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나무도 제사도 없어졌다) 민속유산으로 전래동요로‘아리랑타령’이 있다.        

△길호마을은 호구총수에 칠골약면(七骨若面) 길도촌 지역이었으며 광양현지도에는 골약면 중동리에 속하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건양 1년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광양군에 속해 있던 여러 섬이 돌산군에 편입되었는데, 당시 골약면 중동리 지역이던 길호마을 일부(쭉지 섬, 翼島)가 북면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8년 후인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돌산군이 폐지되면서 다시 골약면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광양제철소 건설로 대대적인 산업구조 변화로 지금은 옛 마을 모습이 사라지고 없다. 옛 길호촌 동쪽에 선착장이 있었고 이를 이용해 바다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채취하고 운반하는데 편리했던 것이다.

이순신대교.



길호도는 기러기 형국으로 생겨 ‘기럭섬’이라고도 했으나 한문표기로 ‘길호도’라고 했으며 호(湖)자는 금호도와 같이 내륙의 호수로 보고 아름다움을 더하여 붙이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바닷가 어촌마을로 어촌계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으로 어업조합의 근간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마을 전체가 이주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촌계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고 길호대교 아래 마을 공동재산으로 굴 밭이 있으나 수질의 오염으로 품질이 떨어져 채취를 금지하고 있다.

현재 중진초ㆍ중동초ㆍ중동중이 있으며 공공기관으로는 환경사업소, 농수산물수출 물류센터, 국립식물검역소 광양출장소 등이 있고 10여개의 교회가 집합해 있는 곳이 옛 길호마을 이다. 발견된 문화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돌도끼 1점과 석검1점 석촉 2점등이 출토 되었는데,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출토된 장소는 옛 길호마을 앞 해상으로 알려져 있다. 

△불로마을은 이웃 오류ㆍ길호ㆍ와우ㆍ세동과 같은 역사를 안고 있었다. 처음 입촌은 영천이씨 남곡 공파에 속한 후담이 광양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는 설이 있다. 세동마을은 전주이씨가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불로란 이름은 처음에는 마을지세에 따라 스님(僧)이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불무동ㆍ불무댕이’로 불리어졌으나 영천이씨의 자손이 귀해지자 집안에서 마을이름 개정을 추진해 승자와 관련된 이름이라 하여 번영과 장수를 의미하는 불로(不老)라 개칭했다고 전한다.

근년까지 행정과 세동마을 앞까지 갯가였으며 벼와 보리농사에 의존해 오다가 일제 때 해태양식으로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주민들은 행정마을의 이름 때문에 광양시청과 주요 기관들이 설치되었다고 이야기 하나 행정(杏亭)마을은 행정을 다루는 행정(行政)이 아니며 은행나무가 있어 행정(杏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을 알았으면 한다.



현재는 중마동의 중심지로 발전해 있으며 문화유산은 운암재(雲庵齋, 영천이씨 재각 1960년 건립)와 모청재(慕淸齋,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영가의 재실1974년 건립)가 있다.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면서 각급기관은 광양시청ㆍ시의회ㆍ소방서ㆍ우체국ㆍ건강보험공단ㆍ중마동사무소ㆍ국립여수검역소 광양출장소ㆍ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ㆍ보건소지소ㆍ파출소ㆍ고용 안전센터와 미관광장이 있는 지역이다.    

△오류마을은 인근 마을과 역사의 궤적을 같이했으며 일부 행정구역개편으로 변화가 약간 있었다. 처음 마을이 형성된 것은 이천서씨 문의공파 서호림이 임진왜란 무렵 옥룡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본래 벼와 보리농사가 주 소득이었으나 해방이후 해태양식에 참여하여 농외소득이 높았으나 광양제철소가 건설되면서 소득원이 없어지고 옛 마을모습은 완전사라지고 지금은 대규모 주택단지와 상가가 조성되어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시설물로는 중마공원ㆍ중마육교ㆍ시외버스정류장과 여러 개의 교회가 있고 열부 전주이씨 포양비가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제주는 대동회 회장이 맡아 제를 올렸던 것이다.

△마흘마을은 인근 마을과 같이 큰 변화는 없었으나 호구총수에 광양현 칠골약면 중동촌에 속해있었다. 왕명으로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 중동리에 속하였는데 일제강점기(지방행정구역명 칭일람) 행정구역개편 이전에는 골약면 마흘리(馬屹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 이름이 나타났다. 광양지구 출장소의 골약면 지역이 되어 법정리로 마동리 행정리상 마흘리 지역으로 되었다.

처음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신안 주씨가 임진란을 피해 이 지역에 은거함으로써 이루어졌고 해방이후에는 이웃마을과 같은 여건으로 살아왔으며 마을에 저수지가 있다. 문화유산은 가야산사지(관음사 절터가 있고, 와편과 청자편이 출토되었다) 주요 시설물로는 가산재(신안주씨 재각)ㆍ커뮤니티센터ㆍ마종제ㆍ국궁사격장ㆍ원가사ㆍ도깨비 거리가 있다.  

△와우마을은 인근마을과 같이 호구총수에 광양현 칠골약면 중동촌에 속했다. 당시 광양현 칠골약면에 속해 있었고 왕명으로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 골약면 와우리(臥牛里)라 표기되어 문헌상 처음으로 현재의 이름이 나타난다.

또한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마흘리ㆍ사동리ㆍ와우리 일부지역이 합병되어 골약면 마동리에 속하게 되었고, 나머지 일부지역은 옥곡면 광영리에 속하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를 보면 가야산 끝자락으로 바다와 접한 어촌마을이었다.

마을을 이룬 것은 광해군 때 창원 황씨가 1630년경 전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번성하였으며, 같은 시기 전주 이씨가 이곳에 와 사돈지간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배씨가 430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는 설도 전하고 있으며 현재 황씨와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해방 후 부락에 해태조합 출장소가 있었으며 선착장이 있었고 부산·여수를 왕래했으며 수산물 운반에 큰 도움을 주었다.

마을 뒤 산 능선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눈쇠’ 또는 ‘눈실’로 불리다가 한문표기로 와우라고 했다. 1942년 마을 앞에 있던 염전을 이병두(작고)가 운영했으나 논이 귀해 간척사업으로 3300평을 조성해 농사를 지었다고 경노회장 길만석이 설명해준다.

문화유산으로는 신암재(창원 황씨 재각)ㆍ효소재(전주 이씨 재각)ㆍ추원재(진주 정씨 재각)조희교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했다. 현재는 급변하는 정세와 도시의 팽창으로 광양시는 도시개발계획을 수립해 추진함에 주민 200여 호가 살던 마을 주민은 거의 철거하고 현재 30여 호만 남아있으며 하루속히 도시개발 기공식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동마을도 인근마을과 같이 큰 변화는 없었으나 호구총수에 광양현 칠골약면 중동촌지역에 속해 있었다. 왕명으로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 골약면 중동리 지역으로 표기되어 문헌상 처음으로 현재의 이름이 나타난다. 마을의 형성은 기계 유씨 부제학공이 하동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하며 유물과 유적으로는 30년 전에 금동불상 1점을 수습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불당 골 사지가 있고 와편과 사기편이 여러 곳에 노출되어 있다. 

사동마을 전래민요로 시집살이타령 “시집 문 들어서니 무섭더라 무섭더라/ 방에 들어서면 시어머니가 무섭고/ 정지문전 들어서니 시누원수가 영 무섭고/ 들밭으로 나서보면 바래불이 원수 되고/ 논으로 들어서면 가래불이 원수더라/ 니 원수가 날 죽이네/ 밤 보따리 싸서들고 웃달 밤도망이나 갈까”이 있다.

그리고 제목 갯바탕 노래(꼬막이 벵이 들어/ 반지랙이 굿을 허고/ 떡조개가 떡을 치고/ 벌떡이가 춤을 추고 장애가 줄을 타고/ 문저리는 피리를 불고/강지바닥 고래고 댕기/술 한 잔에 스러졌네)의 민요는 보전이 필요해 보인다.

이것으로 짧지만 중마동의 사록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