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12. 골약동 문화유산①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12. 골약동 문화유산①
  • 광양뉴스
  • 승인 2013.12.23 09:19
  • 호수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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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약동, 예부터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명성이 자자 지형과 위치

구봉산에서 바라본 순천만


사방팔방이 한눈에 보이는 구봉산 정기가 어린 곳

골약동은 광양시 전 지역으로 보면 중앙을 약간 벗어나 서남쪽 해안에 접해 있으며 광양공업단지의 서편 축이다. 동쪽은 중마동, 서쪽은 광양읍과 접해 있고 남쪽은 해안선으로 일반 공단 부두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옥곡면 선유리 산악지대와 연계돼 있다.

형상은 사각형에 가깝고 광양읍과의 거리는 삼십리 정도이다. 현재 중마동과 골약동은 원래 골약면이었고, 1995년 1월 1일 법률제 4810호(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에 따른 행정 특례 등에 관한법률)에 의거 황금동과 성황동을 합쳐 골약동으로 명칭이 확정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중마동은 위의 같은 법률에 의거 중동(중마동 10~27통 일원)과 마동(중마동 11~28통)을 합해 중마동이라 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골약동은 건대산(件臺産ㆍ구봉산 473m)을 등에 지고 있으며 고삽치(고십재)를 품고 있다. 이재를 넘으면 옥진 길을 이용해 서쪽으로 광양읍을 경유해 순천으로 갈수 있고, 동향하면 옥곡을 경유해 하동으로 갈수 있다.

재 너머에 있는 동광양 톨케이트를 이용해 남해고속도로를 타면 서울과 부산을 갈수 있다. 육로는 하포를 경유해 광양을 갈수 있고 백운로를 이용해 금호동ㆍ태인동을 경유, 경상도로 내왕할 수 있으며 옥곡을 경유해 여러 곳의 길을 활용할 수 있다.

하포는 일제 때 해운을 이용해 여수ㆍ부산 등지로 출입할 수 있었고 광양에서 가장먼저 개설된 신작로가 1922년 하포⇔순천(서면)간 개통되었던 것이다


성황3층석탑


역사적 변천과 유물

고려 이전 골약은 특수행정구역 향(鄕) 2개소, 소(所) 4개소, 부곡(部曲)4개소가 있었다. 명종 2년에 광양현이 처음으로 중앙관리인 감무를 두어 승평군과 분리되었으며 이 지역도 처음으로 우리고장에 파견된 중앙관리의 감독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태종 13년에 감무가 폐지되고 현감을 둠에 따라 이곳은 광양현 골약방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영조 35년 광양현이 12면 147개리를 관할하게 될 당시 호구 304호, 인구 1,069명이었고 면(面)의 장(長)을 권농관(勸農官)이라 했다.

칙령 제13호에 의거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본래 골약면 지역에 속해 있던 9개 도서(태인도ㆍ금호도ㆍ송도ㆍ소륵도ㆍ륵도ㆍ랑도ㆍ묘도ㆍ삼화도ㆍ칼도)가 돌산군에 편입되면서 돌산군 북면으로 되었으나 3년 후 인 1996년에 명칭이 태인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14년 돌산군이 폐지되면서 태인면은 광양군으로 환원 되었지만 이때 묘도는 여천군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묘도가 여수로 떨어져간 것이 내년에 100년이 되니 묘한 기분이 든다. 돌산군이 해체된 것은 당시 일본은 호남지역에서 생산되는 물자(광물ㆍ곡식ㆍ목재ㆍ해산물)를 운반하기 위해 여수항을 화장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여수는 오동포라는 초라한 바닷가 어촌에 불과 했지만 1938년 순천에서 여수까지 전라선을 연결하면서 급속하게 팽창되어 여수시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 면ㆍ리ㆍ동 일람에 의하면 골약면은 10개리 중 6개리(황금리, 황길리, 도이리, 성황리,  중군리, 송장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광양군조례 제 205호에 의하여 태인리·금호리를 통합 관할하는 태인출장소를 설치하였다.

그 후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거, 태인출장소가 태금면으로 승격되면서 골약면의 지도·감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89년 1월 1일부로 출장소가 동광양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6년 후에 광양군과 동광양시가 도농복합형태의 광양시로 개편되었다.

골약의 의미는 ‘크다ㆍ거대하다’는 뜻을 가졌음으로 21세기를 맞아 동북아 물유 중심지로 뻗어가는 거대한 도시가 형성될 것을 예견한 듯하다. 광양시 지역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지역은 금호동ㆍ중마동ㆍ골약동이다.

중마동은 신도시를 형성하면서 7개 마을의 지형이 변화되고 골약동은 광양제철소 건설로 인한 컨테이너 부두 건설과 배후단지 조성으로 지형이 바뀌고 해안선이 짧아지는 변화가 있었다. 이 지역은 옛날 염전이 두 곳(고길포ㆍ도래티)이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마저 찾기가 어렵다.   

현재까지 선사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지형적으로 보아 인근 옥곡ㆍ진상지역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인접해 있는 중동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때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믿어지나 아직 유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근래에 중군리의 중군현지가 성지(城池)라는 설이 있다. 또한 하포를 중심지로 한 인근지역인 사동마을에 청기와가마터가 있고 그 파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2~3곳에 지표조사와 발굴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월드마린센터
살기 좋은 고장 골약동

골약동은 17통 26개 반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비옥한 땅이 넓고 건대산의 뿌리에 조성된 지역이며 풍수지리학으로 보아 건대산 자락에 정승이 9명이나 태어날 곳이라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성황에 어사정(조선제일향(朝鮮第一鄕, 표지 석)이 있으며 그 내용의 하나는 어사 박문수 가 1727년 3월 중순경 이곳을 지나가면서 남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사는 이곳에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성황마을 주막에 들려 국밥을 먹고 나서 곁에 있던 촌로들과 정담을 나누고 떠나면서 남긴 말로 그 내용은 “湖南之 光陽이요, 光陽之 城隍이라”했다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하나의 기록은 영조임금이 감독업무를 마치고 돌아와 알현하는 어사에게 영호남의 민정에 관해 물어보면서 “사람이 살기가 좋은 곳은 어디던고?”하니 어사 박문수는 “전라도지 광양”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 연유는 뒤에 산이 있어 좋은 화목과 산채가 풍부하게 생산되며 앞에는 기름진 들과 품질 좋은 염전(도래티)이 있고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있어 사시사철 어로행위로 먹을거리가 풍족했고 소득이 높으니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교통은 육로에 철길(순천⇔부산)이 있고, 남해고속도로와 일반도로 가있으나 시내 대로인 4차 왕복(이순신대교⇔서측배후단지, 7.5Km)가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새로 개통된 2차 왕복도로를 이요하면 옥진로에서 하포와 초남을 경유해 광양읍으로 나갈 수 있었다.

옛날에는 해상으로 길호 선착장에서 여수와 부산을 오고갈 수 있었고 한때나마 1912년에 개항된 하포항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현재 골약동 호구는 1,199세대에 인구 2,641명이지만 황금동과 성황동의 택지개발이 완료되면 광양의 핵심지역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며 광양의 중심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바닷바람으로 시원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서측배후단지 활용도시기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올해연말 쯤 구봉산에 설치중인 봉로에서 봉화의 불꽃이 타오르게 되면 순천ㆍ여수ㆍ구례ㆍ하동ㆍ남해에서 불빛을 바라보고 빛의 고향을 흠모하게 될 것인바 어찌 사람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겠는가!                                     


유물과 유적의 조명

이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근거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중 도요지를 살펴보면 황방 가마터로 조선시대 도자기를 구웠던 가마터가 있었던 증거로 10m정도 넓이에 흩어져 있으며 백자로 무늬가 없는 대접ㆍ접시 등이다. 그리고 기동마을 녹청자 가마터는 조선시대 가마터로 추정되며 앞산 동쪽 하단부에 위치한 가마의 발견과 함께 다량의 녹청자편이 노출되어 주위에 산재해 있다. 

또한 하포가마터에서 수습된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있던 가마터로 추정되며 논두렁단면에 넓게 가마터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평촌마을 폐고분(廢古墳, 개간해 놓은 밭 주변에서 7점의 청자루가 수습됨으로써 알려진 유적지인데, 1984년 주민 서원태 씨에 의해 처음 발견될 당시 유구자체는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고 신고한 청자 대접 등 5점)의 유물이 있고 강창호 씨에 의해 신고된 청자 병 2점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토된 유물은 고려시대 민용의 부장품인 것으로 추정되며 12~13세기 때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동마을에서도 희 청색 경질 토기 편·청자 편·백자편 등이 수습되었음으로 지표조사와 함께 발굴조사사업이 필요해 보인다.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5호 ‘광양성황리 삼층석탑’이 있으며 권내에 용장사의 신축이 완공돼 있고, 문화적 가치가 충분한 고길(고지포)염전, 황곡연자방아, 어사정 확장정비, 군재마을 장군묘, 중양마을 아마대원(阿磨代院)등을 발굴하고 복원해 향토문화로 보전하기를 바란다. 할 일은 남은 것 같은데, 해는 기울어지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