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12. 골약동 마을별 문화유산②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12. 골약동 마을별 문화유산②
  • 광양뉴스
  • 승인 2013.12.30 10:26
  • 호수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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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박문수가 극찬한 성황마을, 소금을 생산했던 염포리...하포마을, 일제 때 해운 이용해 여수ㆍ부산으로 출입할 수 있었던 곳
광양항 컨테이너부두

마을 탐방이다. 서남쪽에 있는 황방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염포리ㆍ황방리ㆍ고길리ㆍ금곡리가 통합되어 황금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 마을에 문화유적지로 황방도요지(조선시대 도자기를 구웠던 가마터)가 있다.

출토된 것들은 일반적으로 백자들이며 무늬가 없는 대접ㆍ접시가 있으며 황금리 광맥은 일인들의 조사자료인 ‘조선의 취락’(1933년 조선총독부 발행)에 의하면 이곳 광구에서 금은을 채굴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은장묘(銀匠墓, 은장이 무덤)가 있다.

염포는 이 마을 갯가에서 소금이 생산한데서 생긴 이름이고 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되며 생산된 육염은 품질이 우수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연전의 규모는 약 8천여 평 정도이며 일제 때 소유가 일인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 후 농경지화 함에 따라 그 흔적으로‘망앳들’, ‘창들’이란 지명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금곡마을은 위에서 언급한 행정개편으로 황금리에 속하며 자연마을로 금곡이라 했으며 구전으로는 봉화산(烽火山ㆍ烽燧) 광맥이 뻗어있어 금이 생산됨으로 금곡이라 했다고 전한다. 유적지로 전 망해사지(마을 앞에 있었다는 옛 절) 그 주위에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토기 편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으나 망해사 흔적은 찾지 못한다.

기동마을에 있는 석조거북이


유적은 김천록정려(金天祿, 임진왜란 때 판관으로 창의사 김천일ㆍ경상우수사 최경희와 함께) 공을 세워 2등 훈에 열거되었다. 1891년 조정에서 왕명으로 용강리 국도변에 정려 비를 세웠으나 그 후 1982년 출생지인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또한 효열부 파평 윤씨 기행비(시부모에게 효를 다하였고 일부종사하였음을 기념하기 위해 세움)가 있다.

△ 기동마을은 지형적인 여건으로 보아 고려 또는 그 전후에 특수행정구역인 골약소가 있었던 곳이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 행정구역개편으로 장길리ㆍ황곡리ㆍ현곡리ㆍ통사리와 합쳐 황길리에 속하였다.

유적으로는 기동 녹청자 가마터(조선전기 녹청자를 굽던 가마터로 추정됨)는 앞산 동쪽 하단부에 위치인데 다량의 녹청자편이 노출되어 있다. 유물은 석조거북이(마을 입구에 ‘자라바구’라고 부름)의 전설은 약 90년 전에 성황ㆍ하포로 이어지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산등성(거북형)을 헐어버림으로 마을 사람들의 재앙이 두려워 이선달에게 부탁해 거북을 만들어 달라해 이루어 진 것이다.

△ 하포마을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골약소에 속했으며 고려 또는 그 이전에 아랫개(下花浦)와 웃개(上花浦)를 포함해 골약포에 속하였으며 1912년 하포항이 개항되었던 것이다. 왕명으로 제작된 광양현지도에 하포리라 표기돼 있다.

한편 일제 때 행정구역개편으로 장길리ㆍ황곡리ㆍ현곡리ㆍ통사리ㆍ벌등리와 병합되어 황길리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고려말경 안몰 대밭 밑에 사람이 살았다고 전하며 지금도 장독대 터가 남아있고 옹기 편과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하며 일제 때 이곳을 ‘장길리ㆍ진지 끝ㆍ화포’라고 했다.

하포가마터(수습된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있었던 가마터로 추정되며) 논두렁 단면에 넓게 가마터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 골약초ㆍ골약동 주민자치센터ㆍ보건 진료소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진지 끝에 선착장이 있어 여객과 화물을 부산·망덕·여수로 운반하고 사람까지 내왕했고 광양의 특산물인 해태와 수산물을 수출한 곳이기도 했으며 일자가 정해지지 않은 파시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 때 면사무소와 지서가 1914년 하포로 옮겨 왔으나 순천↔여수로 전라선이 연결되면서 하포항이 쇠퇴하게 되자 다시 1938년 성황으로 옮겨갔으나 골약초등학교(1921년 설립)는 이곳에 남아있다. 현재 진지 끝은 광양항 개발로 선착장이 매립돼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니 유적지로써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한다. 광양에서 처음 4m도로가 개설된 것은 1922년 순천 서면 학구정↔하포간 도로이다.   

△황곡ㆍ평촌마을 중 황곡은 황곡저수지ㆍ가장골 저수지ㆍ당산나무(수령 420년, 수고 20m)가 있고 문화유산은 연자방아(연자 메라고도 함) 현재 위짝, 아래짝 모두 있으며 제작년도는 200여 년 전이라고 전하고 있다.


성황마을에 있는 박문수 어사의 말을 새겨놓은 비석
넉-바구 전설(마을 뒤 봉우리에 있는 바위로 예날 총각이 처녀에 반해 결혼을 청하였으나 처녀 집에서 반대했다. 그런데 처녀가 총각을 보고 또 반해 이 바위에 앉아서 죽었다고 한다).

평촌마을 문화 유물ㆍ유적은 공동우물과 폐고분(廢古墳) 개간한 밭 주변에서 7점의 청자기류가 수습됨으로써 알려진 유적지인데 1984년 주민에 의해 처음 발견될 당시 유구 자체는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신고 품 청자대접은 5점이며 강창호 씨에 의해 신고된 청자 병 2점이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유물은 고려시대 부장품인 것으로 추정되며 12~13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통사마을은 고려 말 이곳에서 목씨 성으로 태어난 자가 수군통제사의 벼슬을 했다고 해 통사(通師)를 통사(通士)에서 통사(通仕)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광양현지도에 통사리로 표기되어 있다.

행정개편으로 황길리에 속하게 되었다. 통사저수지ㆍ연자방아(위짝과 아래짝이 원형그대로 보존되고 있음. 아래짝은 지름 120m 두께 20m, 위짝은 지름 120m, 높이 40m이다). 불당골 사지는 폐찰(廢刹)이 되어 알 수가 없다.

△성황마을 유래를 보면 옛날 이 지역에 성황묘(城隍廟,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하여 성황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신이 붙어있는 나무에 제단을 만들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은 물론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 장소였다.

유적으로는 영천 이씨 재각과 효열부(양천 허씨 열행비)ㆍ어사정(조선제일향(朝鮮第一鄕, 표지 석)이 있지만 주민이 세운 것이다. 시설물로는 광양공공도서관ㆍ성황초등학교가 있고 1727년 3월 중순경 어사 박문수가 지나가면서 남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사는 이곳에서 허기져 국밥을 먹고 곁에 있던 촌로들과 정담을 나누고 떠나면서 남긴 말로 그 내용은 “호남지 광양이요, 광양지 성황이라”했다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으나 10일 쯤 후 그가 순천부 암행감찰에서 순천부사 오길수의 밀부(密婦) 탄핵사건이 터져 처리하게 되자 소문이 광양에 퍼져 그가 성황을 지나간 어사 박문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용장마을은 현재 봉화산 가는 길을 새로 포장한 긴 골짜기에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진양 정씨가 입촌했다고 전해지며 사곡본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용소가 있었는데 그로 인해 마을이름이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유물로는 3층 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5호)이 있으며 성황 3층 석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지금 이 골짜기에는 부처를 모시는 사찰이 5~6개나 있다. 그리고 고동바구는 도로변 큰 바위벽 중앙에 고동모양으로 패어져 있다.

△정산마을은 조선총독부령 111호 도ㆍ부ㆍ군의 명칭과 위치·관할구역 기타에 관한 사항에 의해 수동리ㆍ성황리ㆍ정산리ㆍ용장리와 합병돼 성황리에 속했던 마을이다. 유적지로는 정산도요지(마을 동쪽 안골)가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유씨 제각과 가옥이 들어있다.

도요지의 형태는 알 수 없고 자기편만이 도요지였음을 알려주나 17세기 가마로 추정되고 있으며 전문가의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유물로는 정산재(定山齋, 기계 유씨 부제학 공파의신의 후손 복백의 재실)가 있다.

옛날 마을 북쪽으로 고삽치(고십재) 재가 있었는데 골약 사람이 광양으로 넘나들 때 지나던 고개다. 고개가 높고 험해 지역민들의 숙원사업이었는데 설봉 김종호 장관의 지원을 받아 고개를 낮추었으며 광양제철소가 건설되면서 4차선도로가 만들어져 서울과 부산으로 가는 고속도로 입출로가 있어 편리해 졌다. 

△중양마을은 고려시대 아마대부곡이란 특수지방행정구역이었으며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아마대원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 마을에 원터골이란 골짜기에 원(院)이 있었다는 것은 광양읍지에 명기돼 있다.

원이란 관리의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30~40리 거리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아마도 고개전설(어느 남매가 길을 가다가 비를 맞게 되었는데 그치고 나니 옷이 빗물에 젖어 나체 형으로 보여 동생이 망칙한 생각을 잠시 했다가 후회하고 그 속죄로 성기를 돌로 찍어 죽었다. 누나는 내려가다가 오지 않아‘아마도아마도’를 생각하던 끝에 다시 올라가보니 동생이 죽어있었다)이 전한다. 

△군재마을은 중군리 군장과 재동 두 마을이 합해지면서 이름이 확정되었다. 이곳에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가 피난을 위해 토굴생활을 한 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치기위해 이곳 토굴에서 매복했다고 해서 군장(軍莊)이라 불렀다고 한다.

혹은 가야산에 있는 대장군의 묘에 연유됐다는 설도 있다. 유물로는 효열부(보성선씨 비, 장군묘 사람모양의 석조물에 중국연호 ‘月影堂’이 표기되어 있다. 이로써 광양시 읍면동을 한 바퀴 돌아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