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윤동주 문학관 건립’배경
서울 종로구‘윤동주 문학관 건립’배경
  • 광양뉴스
  • 승인 2014.04.2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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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동 래(시인·수필가)

명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작품을 남긴 시인은 28세에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그토록 바라던 조국해방을 반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윤동주다. 그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1917년 12월 30일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에서 3남 1여중 장자로 태어났다.

1925년도 만 8세 때 명동소학교에 입학했으며, 이 학교를 졸업하고 대립자에 1년간 수학, 은진중학교에 편입, 평양 숭실중학교 전학 후, 용정 광명학원 4학년으로 편입함으로서 그동안 여러 곳으로 옮김에 따라 1년간이 누락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1938년 2월 광명학원 5년제를 졸업하고 그해 연회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와 정병욱의 만남은 정병욱이 1940년 신입생으로 기숙사 생활하고 있을 때 윤동주가 정병욱의 방으로 찾아왔다. 정병욱의 글이 조선일보 조간에 등재된 것을 읽고 그 신문을 들고 와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생활은 밀착되었다.

그들은 학창시절 19개월 동안 한방에서 형제의 정을 느끼면 살았고 책을 구입할 때나 동생들의 선물을 구입할 때 동주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정병욱은 ‘잊지 못할 동주형에게’라는 글에서 당시의 실상을 소상하게 남겼다.

선현들이 남긴 업적을 역사기록이나 비(碑)또는 정려(旌閭)등 다른 방법으로 추모해 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근대에 접어들어 업적의 현창사업을 활용해 관광사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방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지는 않는지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내용을 문학적으로 고찰해보면 춘천시 김유정 역, 평창 김삿갓(김병현) 문학관, 이효석 메밀동산, 고창 서정주 문학관, 김제 조정래 문학관, 고창 서정주문학관, 양평 황순원 문학관(소나기 마을), 종로 윤동주 문학관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소설 속에 한 줄의 이야기를 토대로 황순원, 심청, 홍길동을 극대화시켜 관광자원화로 활용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에게 윤동주 시 원고를 보관했던 물증이 보물과 같이 존재하고 있지만 활용하지 못함은 무슨 연유인지 아쉽기 그지없다.

종로구 자하문 근방에 세워진 윤동주 문학관에 관해 채록으로 건립된 배경을 살펴보니 10여전 윤동주 시를 사랑하는 시모임(윤사모)이 결성되어 있었다. 이 모임은 매년 조촐한 기념행사를 가졌고 기념관을 건립해야겠다는 뜻을 품고 있던 중 건축학전공인 김영종 구청장이 민선으로 구청의 책임을 맡고 나서 윤사모의 뜻을 받아들여 중앙의 지원금과 구청예산을 확보해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418일 후인 2012년 7월 25일 정식개관이 되었던 것이다.

장소로 선정된 곳은 1960년대 초에 건립된 청운동 아파트에 식수를 공급했던 물탱크였다.
이곳을 선정한 사유는 동주가 학창시절 생활했던 누상동 하숙집과 인왕산 중턱까지 산보를 다녔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선정된 것이다. 또한 이 건물은 2008년에 용도폐기된 것을 재활함으로써 동주의 일생을 조명하는데 적합하다는 전문가의 판단 때문이다.

전문가인 이소진은 프랑스 파리의 아뜰리에 리옹에서 10년간 근무하고 돌아왔고, 이사업을 책임지게 된 것은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시인과 사업의 뜻을 깊이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당초의 물탱크 두 개에 전시실과 행정실을 추가해 만들어졌고, 전시물로는 용정에서 가져온 난로ㆍ걸상ㆍ우물 안에 있던 송판과 호적부ㆍ학적부는 물론 시집 40여 종류와 기타 유품이 전시돼 있다.

가상전시실인 제2실은 이미지 실로 천정을 모두 걷어내고 하늘을 볼 수 있게 해 밤에 별을 헬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곁에 붙어 있는 제1실도 이미지 실이며 이곳을 모두 밀폐된 공간으로 감옥을 연상케 했다. 더욱이 벽면에 있는 조그마한 창으로 스며드는 빛은 밝은 세상을 갈망했던 동주의 뜻을 나타낸 것이며, 이곳에는 동주의 일생에 대한 영상을 방영하고 있다. 그리고 밖에는 인왕산을 산보했던 추억의 산길을 만들었으나 쉼터가 좁은 것이 아쉽기만 했다.

이 사업의 관장은 구청에서 직영하는 것이 아니라 20억 원의 출연금과 10여명의 직원으로 구성된 종로구문화재단에서 문화와 예술사업을 이끌어가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고장은 명성 높은 문화유산이 빈약한 편이므로 스스로 문화와 예술을 창조해 가야하는 실정이다.
 박수소리는 두 손이 마주쳐야 하듯,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은 어미의 탁(啄)과 새끼의 줄(?)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깨어난다는 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