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사람<1> 백운산 상백운암 지킴이 정륜스님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사람<1> 백운산 상백운암 지킴이 정륜스님
  • 광양뉴스
  • 승인 2014.06.16 09:35
  • 호수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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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철 (광양문화연구회 회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암자 입구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깨달음을 구하기 전에는‘죽어도’문을 나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문틀 위에 무문‘사’관(無門死關)을 적어놓고 다시 한 번 3년 수행에 들어갔다.

광양문화연구회에서는 올해의 목표를 현재 광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인물을 발굴하여 지역신문에 소개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중 필자는 외지에서 광양으로‘굴러온’사람들이 기존의‘박힌’토박이들과 지역의 문화를 가꾸며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최근 공업 도시로 급성장한 광양에는, 경상도 대구에서 굴러와 21년째 살고 있는 필자와 같은 다른 지역 출신들이 꽤 많다.

이러한 분 중에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닌 광양의 새로운 문화를 일구는 이들도 제법 있는데, 그 첫 번째로 상백운암 중창 불사를 일으킨 정륜 스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속의 법을 버리고 부처님의 법을 택하다

출가하신 스님을 속가로 모셔오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광양의 문화인물로 스님을 소개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부탁드리자, 스님은 부끄럽다는 말씀을 누차 반복하며 필자의 애를 태웠다. 물론 속세로 나오길 거부하고 버티는 스님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 힘겨루기에서 속물인 내가 이겼다.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스님의 자비로움 덕택에.

세상사는‘알면 병, 모르면 약’인 경우가 많다. 배우자의 결혼 전 이성 교제와 성직자의 출가 전 사생활 등은 알아서 득이 될 것이 없다. 이러한 것들은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다.

지금부터 상백운암 정륜 스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당연히 출가 이후 수행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래도, 우리 같은 속인들은 열어서 감당이 안 될지라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다. 이러한 세속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하여 정륜 스님의 출가 전 이야기는 스님 몰래 아주 조금만 공개하겠다.

수행자에게 세속의 나이, 즉 세랍(世臘)은 의미가 없다. 승려에게는 출가하여 수계한 이후의 햇수가 중요하다. 이것이 법랍(法臘)이다.


정륜(正輪) 스님은 화엄사 조실 도천(道川) 스님을 은사로 늦깎이 출가를 했는데, 올해로 법랍이 약 20세이다. 그러나 법랍은 스님들에게 중요한 것이고, 우리네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랍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띠만 공개한다. 스님은 소띠다.

출가 이후 정륜 스님은 중앙승가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불교사학연구소에서 3년간‘부처님의 법’을 연구했다. 학창 시절 스님의 전공을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해서 스님 전공이‘세속의 법’이었고, 한때 사법고시를 준비했음을 살짝 밝혀둔다.

고시원에서 세속의 법을 공부하던 중 우연히 불교경전을 접하고 새로운 정신세계를 찾아서 출가를 결심했다. 출세를 위한 세속의 법을 미련 없이 버리고 진리를 구하기 위한 부처님의 법을 택했다.


대자암 무문관에서 3년간 용맹정진하다

정륜 스님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수행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큰 사찰인 화엄사, 해인사, 직지사, 법주사, 개심사 등지의 선원에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안거(安居)했다.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외출을 일절 금하고 수행하는 일을 안거라 하는데, 음력 사월 보름부터 칠월 보름까지를 하안거, 시월 보름부터 이듬해 정월 보름까지를 동안거라 한다. 앞서 말한 스님들의 법랍은 바로 하안거를 지낼 때마다 1년씩 더한다.



깨달음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정륜 스님은 안거만으로는 진리에 대한 배고픔을 채울 수가 없었다. 마침내‘문 없는 관문’, 이른바‘무문관(無門關)’에 들어갔다. 무문관은 깨달음을 구하기 전에는 밖으로 나오는 문이 없는 방이다. 타력으로 갇힌 ‘감방’과 스스로 가둔‘무문관’은 분명 다르지만, 타인이 밖에서 빗장을 채운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 빗장은 천 근의 무게로 안에 갇힌 자를 내리누른다. 무문관 수행은 옛날 스님네들이 공부에 견처(見處)가 있을 때, 생사를 걸어놓고 용맹정진하기 위해 택했던 가장 치열한 공부 방법이다. 정륜 스님은 계룡산 갑사 대자암 무문관에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결사를 회향했다. 하루 한 끼 공양하는 3년간의 수행으로 어금니 10여 개가 빠질 정도의 용맹정진이었다.


정륜 스님, 백운산 상백운암으로 오다

무문관 3년 수행으로 건강을 크게 다친 정륜 스님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2010년에 광양 백운산 상백운암으로 왔다.

물론, 이곳에서도 정륜 스님은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암자 입구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깨달음을 구하기 전에는‘죽어도’ 문을 나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문틀 위에 무문‘사’관(無門死關)을 적어놓고 다시 한 번 3년 수행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2012년 태풍으로 인해 상백운암 슬레이트 건물들이 많이 파손됐다. 이때부터 스님은 개인적인 수행에다가 상백운암의 중흥과 재조명이라는 화두를 하나 더 첨가했다.

호남정맥의 최고봉인 백운산 정상 아래 해발 1,000m 고지에 위치한 상백운암은 통일신라 말기에 선각국사 도선이 처음 산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시대에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 조선 시대에 벽암각성과 회은장로, 지난 20세기에는 금오 스님과 구산 스님 등의 내로라하는 큰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행했다.

특히 송광사의 초대방장 구산 스님은 1948년 여순사건 때 빨치산 임시사령부로 사용되다 불타버린 상백운암을 1957년 복원하여, 이곳에서 9년을 수행했다. 그래서 법명도‘아홉 구’자와 ‘뫼 산’자를 따서 구산이라고 지었다.

상백운암의 인법당은 구산스님이 지은 이래 지금의 다 허물어진 토굴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정륜 스님은 바로 이 토굴을  옛 상백운암 전성기 때의 모습으로 중창하여 스님들의 수행처로 중생들의 안식처로 복원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상백운암 중흥의 꽃을 피우다

상백운암 복원을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재원 확보였다. 정륜 스님이 산에서 내려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결과 전라남도와 광양시의 지원을 끌어냈고,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해발 1,000m 고지의 상백운암으로 헬기를 이용해 건축자재를 운송하여 마침내 2014년 봄에 인법당을 복원했다.

그러나 정륜 스님은 이것이 상백운암 복원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멀고 먼 깨달음의 길처럼, 앞으로 조사전 복원과 공양간과 요사채의 건립까지 중창 불사의 길도 만만치 않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렇게 정륜 스님이 상백운암 중창 불사에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은 상백운암 신도회 회장인 광양 토박이 백명현 거사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남 합천 출생의 정륜 스님은 상백운암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려 와서 광양의 토박이 백 거사의 도움을 받아 광양의 역사와 불교문화를 일구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말 필자가 상백운암에 올라 스님과 담소를 나누는 중, 백운산 등산에 나선 광양의 젊은 총각이 예쁜 초등학교 원어민 여선생님과 함께 암자에 들렀다.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이들에게 상백운암의 석간수 한 잔을 내밀었다. 그 무언의“물 한잔 하시게(喫水去)”행위 속에 광양 주민과 함께 지역 문화의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스님의 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