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3> 전통 궁시의 맥을 광양에서 잇다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3> 전통 궁시의 맥을 광양에서 잇다
  • 광양뉴스
  • 승인 2014.06.30 09:52
  • 호수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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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장‘김기’옹 이야기

 

전통 궁시의 맥을 잇는 궁시장 김기 명인.


광양에‘광양궁시전수교육관’이 건립된다. 전통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예능을 전수하고 보존관리를 위한 전통문화유산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광양시의 의지다.

이는‘광양장도박물관’과 쌍벽을 이루는 전시관으로서 광양이 전통문화재의 맥을 잇는 메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 궁시의 맥을 잇는 중심에는 탁월한 화살 제작과 불굴의 장인정신을 인정받아 1986년 전남도로부터 무형문화재 12호‘광양 궁시장’으로 지정받은‘김기’옹이 계신다. 그 분의 삶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보자.


‘그 때는 일할 만했제!’

교육관은 1층에 전수공방, 전시실, 휴게실, 체험학습장, 2층에 교육실, 기능보유자와 전수 교육조교의 연구실과 상시 거주할 수 있는 생활동 등을 설치해 복합문화공간으로써 8월 쯤에 개관하게 된단다.

전통문화재 전수교육관이라는데, 건물 외관이나 자재는 우리네 전통의 맛을 느끼기에는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입구 외부 벽에 타일로 궁시와 관련 있는 모자이크식 그림이 새겨질 예정이라 하니 완공되고 난 후면 느낌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안내를 받고 들어선 실내는 휑했다. 아직 작업대조차 설치되지 않은 작업실에는 간단한 도구와 시누대 몇 다발이 세워져 있었다. 벽에는 당신이 제작하신 각궁과 죽시 모음 세트 액자가 두어 점 걸려 있을 뿐 별다른 가구들이 없었다. 탁자도 없이 의자 두 개를 마주하고 앉았다.

김궁시장께서 만든 화살은 국궁을 쓰는 궁사들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명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단단한 데다 정교하고 명중률이 높다.

값이 비교적 비싼데도 카본 화살이 대중화된 1987년 전까지 당신이 제작한 화살은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을 정도였다.

“그 때는 일할 만했제.”

단순히 궁도인들의 화살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재를 전승 발전시키자는 차원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그래서 각종 전승공예대전이나 전국전통공예품 경진대회에서도 수차례 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국궁의 필수 장비인‘깍지’를 실용적이고 편리하게 개발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 전수교육관이 개관하면 그 때의 그 영광이 다시 되살아날까?


우연이 아닌 억겁의 인연이 아니었을까

“내가 처음부터 화살 맹그는 일을 배우고자 헌 것은 아니었제.”

화살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고, 그 우연한 만남이 평생의 업이 되었단다. 하지만 당신의 말씀을 듣다보면 이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며 억겁의 인연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1940년 일본에서 태어난 당신은 일본 패망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전남 여수에 자리를 잡았다.

인근에 여수 충무정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그 활터를 놀이터 삼아 기웃거리게 되었고, 심심찮게 궁도인들의 잔심부름도 하게 되었다. 그 잔심부름이 궁시장이 되게 한 효시가 된 셈이었다.

14살 무렵 강원도에서 박상준 선생이 여수에 내려오셨다. 박상준 선생은 조명제, 이석훈 선생과 함께 6·25 전쟁 때 개성에서 내려와 전통화살 제작하시는 분들인데 후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으로 지정된 명장이셨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장죽(海藏竹)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화살의 재료는 해장죽이어야 하는데, 당시 여수 오동도에 해장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먼 길을 내려오신 것이었다.

내친 김에 여수 궁도인들이 당신들이 쓸 화살을 좀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마침 심부름 아이를 구하던 차에 당신께서 자연스럽게 그 일을 맡게 되었다. 한 삼 개월 정도 일을 해서 일대의 궁도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다시 올라가셨다. 그러기를 한 삼 년 남짓 지냈다.

박상준 선생이 만들어준 화살만으로는 여수 궁도인들의 갈증이 해갈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니가 그 동안 배웠을 팅께 어디 한 븐 맹글어 보거라.”하시며 독려했다.

어르신들이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 사정을 박상준 선생께 연락했더니 몇 가지 공구와 방법을 알려왔다. 궁시와의 인연을 그렇게 시작되었다.

“잔심부름만 함시롱 어깨너머로 봉 것을 맹글랑께, 어디 쉰 일이간디.”

만든다고 만들었지만, 화살다울 리 없었다. 그래도 화살이 궁했던지라 잘 만든다고 한 마디 씩 칭찬해 주었다. 그게 힘이 되었다. 하지만 쉽게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왕 만들 바에야 좀 더 잘 만들어보자고 마산에서 화살을 만드는 조명제씨를 찾아갔다. 삶의 결정적 시기라고나 할까. 그리 들어선 길이 끝내 외길이었다. 

 

 


“참, 힘든 세월이었제!”

이 한 마디가 궁시장으로서 살아오신 당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의 우리에게 전통문화란 무엇을 뜻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문화를 지키겠다고 평생을 살아온 장인들은 무엇이며 또한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말씀하시는 내내 당신이 일생은 넉넉하고 행복했다기보다는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특히 한 가장으로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일생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더구나 재료의 현대화로 인해 대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편리성 때문에 입지가 좁혀지는 여건은 그 자체의 명맥조차 이어가기 어렵게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장인들만의 고집과 오기 정신이 올곧게 살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조명제 죽시장은 가족 중심의 공인들에다 그 외 몇 명의 도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조명제 죽시장은 김기옹에게 가장 어려운 일을 맡기셨다.

대찌기였다. 화살을 만드는 과정은 대찌기에서 마무리까지 130차례의 손길이 간다고 한다. 그중 에서도 대나무를 불 위에 올려 구우면서 색깔을 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8백도가 넘는 열을 가하니 조금만 잘못해도 타지거나 부러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색깔을 낸 대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위아래에 터지지 않게 소등심을 갖는다.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이 작업은 아무에게나 맡기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이 작업이 원만히 잘 이루어져야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야 했고, 더 부지런히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기를 한 삼 년, 군에 입대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일했다.

군대에서 제대를 하였지만 특별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던 차 다시 조명제 궁지장을 찾아가 일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기능이 익혔다 싶어 홀로 독립하기로 하고 창원에서 공방을 열었다. 하지만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예천으로, 울산으로 옮겨다니다가 광양으로 찾아들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아쉬움은 더 크고 깊어만 가고

“이 전수교육관 하나 짓는디도 별 고상 다했제. 여그저그 내 발로 뛰어댕겨서 이나마도 설립되게 되얏제.”

이 전수교육관이 개관된다고 해서 그 옛날이 영광이 되살아날까? 화살을 더 많이 만들게 되고, 더 유명세를 타서 지명도든 경제성이든 커다란 변화가 올까? 회의적이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쪼그려 앉아서 활을 만들고 살대를 다듬어온 삶의 열정을 인정받아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선정됐다고 해서 제작 과정의 수고로움이 덜해지거나 경제적인 큰 도움을 얻은 것도 아니듯이.

“무형문화재란 배고프다는 말하고 같어. 민족정기를 잇겠다는 일념으로 화살을 맹글어 왔지만서두, 작업 중에 왼손 엄지손꾸락을 톱으로 잘라부렀당께. 그냥 내버러둘라다가 거시기 해서 떨어진 살점 주워다가 12번이나 수술했어. 그 때 살림 다 날렸제!” 회환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짊어진 짐이 이제는 너무 버거우신 모양이다.

“젤로 아쉬운 것이 전수생을 두지 못한 거여. 먹고 살만 한 일이 못됭??배우다가도 다들 도망가고 말등마. 그걸 보고 우리 막내가 이어보것다고는 허는디 가슴이 막막혀!”

듣고 있자니 내가 더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 밑에는 경제적인 이유였다. 돈벌이만 된다면야 어찌 떳떳하게 가업으로 이어주지 않겠는가? 우리 전통문화재의 현주소가 여기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글고, 또 하나 아쉬운 것은 나라에서 인정혀주는 궁시장이 못 된 것이구먼. 내 능력이야 알 만헌 사람덜은 다 알고 있는디도 아직까지 이러고 있구먼.”

말씀 속에는 못내 세상에 대한 야속함도 담겨 있는 듯했다.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주면 좋으련만 당신일이라서 차마 챙기지 못하시고 눈치만 본 세월이 얼마였을까? 누군가가 나서야 할 일인 듯싶다.

아직도 더 듣고 싶고, 궁금한 이야기들이 더 많았지만, 시간 관계상 일어서야 했다. 마당 주차장까지 따라 나오시며 정을 가득 담아 배웅해 주셨다.

운전하여 돌아오는 내내 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박행신 (광양문화연구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