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시인의 만남
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시인의 만남
  • 광양뉴스
  • 승인 2014.06.30 10:09
  • 호수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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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의 대가 정병욱 교수 2
이제 병욱의 아버지 정남섭씨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정상철 옹의 9남매 중 네 번째로 태어난 장남이다. 그리고 성장해 3남 1녀(병욱, 병완, 덕희, 병기)를 두었으며, 차남 병완이 쓴 글에 의하면 아버지 남섭은 청소년 때 할아버지인 상철옹으로 부터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연마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기를 맞이한 시기에 나라는 일본의 침략으로 망해가는 조국이 되었으며 이를 지켜보며 참담한 현실을 관망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 1919년 3.1 독립만세사건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번져갈 때 남해에도 독립운동이 불길처럼 번지자 이에 가담했다. 그때 주동자는 그곳에 거주했던 이예모 씨고, 3월 3일 남해 장날 1천여 명이 운집해 만세를 부르는 운동으로 발발했던 것이다. 이때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23명의 명단이 설천면 문항리에 있는 3.1운동 기념탑에 새겨져있으며 그중 정남섭씨의 이름도 음각돼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체포 구금되었고 옥사한 사람도 있었으나 남섭씨는 친 인척 집으로 피신을 전전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감시로 취직은 물론 생업에 큰 지장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 당시 그곳 설천면장이던 집안 어른께서 보다 못해 새로 설립되는 경상남도 교원양성소에 입학하면 만세사건에 연루된 죄가 사면된다고 권했다. 해서 그는 진주로 가게 되었고 1922년 2월 동 양성소 제1기로 수료하고,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그해부터 4년 동안 공립보통학교 교사를 역임 했다.

그해에 병욱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고 나자 아버지인 상철 옹은 가솔들은 데리고 1926년에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 1153번지로 옮겼다.

따라서 남섭씨도 금남면에 소재한 진정공립보통학교로 옮겨 1933년까지 근무한 이후 11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사직하게 된다.

그리고 남섭씨는 1년 후에 멀지 않은 섬진강 하구의 상업 요지인 광양군 진월면 망덕리(望德里) 22번지로 옮겨 전 재산을 투자하여, 진상면 김현주로부터 양조장을 인수해 경영한 결과 사업이 크게 번창하자 그 여세로 과수원(果樹園), 어장(漁場), 정미업(精米業), 해태업(海苔業) 등 각종 사업을 확장해 갔다.

한때는 남해 하동 광양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하구의 상권에서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했고, 선견지명인지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인지 문중의 후생(後生)들의 교육사업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게 된다.

자식들은 병완만 진월보통학교를 졸업했고 나머지는 모두 보통학교부터 하동, 진주, 서울 등지로 유학을 보냈으며, 방계의 종질에게도 진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하동의 자그마한 산촌에서 한집안 친인척이 7명이나 중학교 이상을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일제 치하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남섭씨는 지방사업가로서는 보기 드문 풍류객이요 멋쟁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활(弓道)도 잘 쏘았고, 시회(詩會)를 즐길 뿐만 아니라 바둑도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사업가이자 선비로 대접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남섭씨는 더욱 사업에 분발하여 양조장 외에 진월면 오사리 인근에 큰 과수원(果樹園, 배밭)을 마련하여 생산품을 상품화하여 부산으로 반출했던 것이다. 당시 경남 하동과 부산으로 연락선 겸 화물선을 겸한 대형선박이 하동장날인 2·7일에 왕래했었기 때문이다.

어장(漁場)은 섬진강 하구에서 생산된 장어·농어·전어 등을 상품화하여 외지로 반출함으로서 큰 이문을 얻게 된 것이다.

또한 정미업(精米業)을 시작해 신식도정기계를 도입해 새로운 방법으로 도정률을 높이고 미질을 향상시키는 등에 기여했다. 해태업(海苔業)은 당시 자본가만 할 수 있는 백운산에서 채취한 산죽(山竹, 해태생산 재료)을 수집해 망덕에 있는 수협(水協)에 납품하여 이문을 얻었던 것이다.

병욱의 연희전문 학적기록부에 아버지 직업은 양조업이고 재산은 10만원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해방 후인 1945년 10월까지 미군은 군정체제를 완성하고 남한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재력과 덕망을 갖추었음인지, 해방 초기 미군정 때 정남섭씨는 임명제로 진월면장을 2년8개월(1946년 4월 15일~1948년 12월 14일)간 역임했다. <다음호에 계속>

조동래 시인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