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4>농부네 텃밭 도서관 서재환 관장
광양문화연구회가 만난 사람 <4>농부네 텃밭 도서관 서재환 관장
  • 광양뉴스
  • 승인 2014.07.07 09:54
  • 호수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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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속에 피어나는 소박한 ‘행복’

책 권하는 남자

30여 년 전에는 지역마다 작은 도서관이 많았다.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서재환 씨(58세). 1981년 마을에서 책을 모아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른 바 마을문고였다. 책이 많아지자 읽을 사람을 직접 찾아 나섰다. 일과가 끝난 오후, 리어카에 책을 싣고 돌아다녔다.

95% 이상이 어린이 독자였지만 간혹 어른들도 책을 집어 들었다.“모르제, 뭐. 권항께 헐 수 없이 집어들었능가. 하여튼, 만나는 사람마다 책을 권하고 댕겼응게요.” 198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경운기에 책을 싣고 독자들을 찾아 다녔다.

둥굴레차를 끓여주는 안주인은 안색이 파리했다. 퇴원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기력이 없다고 하였다. 그 너른 살림을 보살피다가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아볼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텃밭 도서관을 취재해보겠다고 하자, 누군가가 안주인을 취재해보라고 하였다.

텃밭 도서관을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는 뭐니 뭐니 해도 안주인 장귀순 씨다. 궂은 일 한번 해보지 않고 시집온 대구처녀지만, 이제는 손등이 닥나무 껍질이 다 되었다. 몇 해 전, 필자는 엉겁결에 김장을 도와주러 갔다가 어마어마한 양에 놀라 뒤로 넘어질 뻔한 적이 있다. 하루가 멀다않고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왔으니, 그 엄청난 배추더미도 결코 많은 양이 아니라고 하던 안주인(장귀순, 52세).

장귀순 씨는 아들이 자신을 ‘수소처럼 일하는 엄마’라고 한다며 웃었다. 서재환 씨는 아내를‘곰 같은 여자’라고 하였다. ‘일이 넘치면 쉬엄쉬엄, 아프다고 해가면서 해야지.’, 미련이 곰탱이처럼 일을 하는 여자라고 타박을 하였다.

잘 노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텃밭도서관은 멀티공간이다. 책과 놀이 공간이 어우러져, 주말이면 찾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찾아간 4월 26일, 토요일은 주말답지 않게 한가하였다. 세월호 여파였다. 돌잡이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너른 마당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흡사 새집처럼 나무 위에 지어놓은 별채는‘하늘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서재환 씨가 시나브로 지었다고 하는데,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관이 텃밭도서관과 안성맞춤으로 어울려 보인다.

올라가 보면 의외로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새 둥지 안의 새가 된 기분, 마음속의 다락방에 올라 온 기분이 든다. 서재환 씨가 가장 아끼는 공간이라고 한다.

이 작은 변방의 소도시에서도 우리는 이미 문명의 이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고, 시간에 쫓기는 일상은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곳 텃밭도서관에서는 잃어버린 동심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아날로그적인 꿈꾸기. 서재환 관장이 추구하는 텃밭도서관의 존재 방식이다.

어느 날 가면 연못을 파고 있고, 어느 날 가면 잔디 미끄럼틀을 만들고 있고, 어느 날 가면 흔들다리가 만들어져 있는 텃밭 도서관은 세월의 힘으로 세운 도서관이다.

“책은 도시에 더 많은데, 굳이 이 촌구석까지 와서 책을 읽을 게 뭐 있나요. 놀다가 지치면 책 보는 거지. 아이들 손잡고 오는 부모가 정말 반가워요. 요즘은 너무 일찍부터 어린이집이다, 유치원이다 보내는데 사실 부모만한 교육기관이 어디 있겠어요?”

서재환 씨는 끊임없이 놀이기구를 만들어낸다.
“내가 원체 게을러요. 일머리는 좀 있는 것 같아. 기냥 뚝딱뚝딱 만드는 거지, 뭐.”

전통 놀이기구를 재현하여 어른들에게는 추억을 선물하고, 아이들에게는 신기함과 재미를 가르쳐 주는 곳. 놀이터 같은 도서관. 아니 도서관 같은 놀이터이다.

굴렁쇠, 깡통말, 죽마, 널뛰기, 활, 줄배, 잔디썰매, 공중줄타기, 시소, 그네 등의 전통놀이와 우물물 긷기, 펌프질하기, 짐승 먹이 주기, 매실 따기, 감자 캐기, 마늘 캐기, 옥수수 따기, 밤 줍기, 김장하기,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은 체험꺼리가 이 도서관의 살아있는 책 목록이다.

행복은 능력이다

마당가 간이 도서관에서 서재환 관장은‘싸움’을 말하였다.“찔거야 이긴다” 고 하였다. 힘없고 덜 똑똑한 사람이 싸움에 이기는 방법은 그 것뿐이라고 하였다. 청룡산을 지켜야 했던 몇 년의 세월과, 그 동안의 마음고생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아름드리 홍송이 베어져 나가면서 시작되었던 싸움은, 생각만으로도 지긋지긋하다며 서씨는 고개를 저었다.

도서관 입구, 백로가 깃을 치던 동산에 소각로 공장이 들어선다는 느닷없는 소식이 들렸다. 그냥 공장도 아니고, 폐기물 소각장이라고 하였다.

2007년 그 겨울,‘서울로 간 경운기’로 경향의 언론을 장식하였던 서재환 씨. 마을 사람들과 데모란 것도 해보고, 관계기관을 찾아가 하소연도 해보았다.‘몇날 며칠 잔치도 벌이고, 잘 놀다가’ 결국 경운기에 책과 간단한 취사도구를 싣고, 혹한을 넘어‘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정을 강행했다.

그 때도 아내는 병중이었다. 아내는 틈틈이 투석을 해가며 경운기에 동승했다. 전국 각지에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시련과 성원의 시절이었다.

삶터이자 소박한 문화공간을 지키는 일이 개발논리와 부딪쳤을 때 났던 파열음은 서 씨를 지치게 하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일은 이제 끝났다. 2010년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졌다.

살면서, 불행할 수 있는 조건은 너무나 많다. 아픈 가족, 내 맘을 몰라주는 이웃, 돈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 등. 그럼에도, 더욱, 즐겁게,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서 씨는 말하는 것이다.

오지게 사는 촌놈

이야기는 다시 세월호로 돌아온다. 믿을 수 없는 사고이지만, 일어 날 수밖에 없는 사고였다.
밥그릇만 불리려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이 텅 비어 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따지다 보면 한숨만 나오는 실정이다. 서재환 씨의 작은 도서관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잃어 버렸던 소중한 것을 일깨워 준다.

서 씨는 몇 년 전, 오지게 사는 촌놈이란 책을 펴냈다. 소소한 일상을 광양 동부권 방언으로 풀어냈다. 사라져 가는 방언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얼핏 엉성하고 촌스럽지만, 그래서 더욱 정겹고 편안한 공간.

-농부네 텃밭 도서관.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텃밭을 일구듯 소박한 행복을 일구는 그 곳은 진상면 청암리에 있다. /정 은 주 (광양문화연구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