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靈山) 백운산의 아픔과 송전탑
영산(靈山) 백운산의 아픔과 송전탑
  • 광양넷
  • 승인 2007.07.19 09:32
  • 호수 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선배 한 분이 작년에 광양에 들른 적이 있다. 동창생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정장차림을 하고 왔지만 차속에 등산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걸음을 멈춘 백운산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느냐며 백운산 상봉을 밟은 후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만나면 백운산 등산의 추억을 되뇌곤 한다. 산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의례적인 인사말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필자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강한 인상이 오래도록 남은 것 같았다.   

작년 가을쯤 제주도에서 전남에 답사를 온 일행 몇 분과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지역의 별미를 찾기에 전어회를 권유해서 야외에서 먹게 되었다. 그런데 도심 곳곳에 세워져 있는 전봇대와 사이사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전기선들을 보면서 내방객은 “도심 한복판에 전봇대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도 시민이나 시민단체에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였지만 내 자신의 무신경과 무관심이 부끄럽고 창피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이곳은 시내 곳곳에 세워져 있는 전봇대의 지중화 작업이 몇 달째 한창이다.

요즈음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백운산 송전탑 설치와도 연관되는 점이 있어 필자 개인적인 일화 두 가지를 먼저 소개했다. 뒤에 소개한 일화는 여러 가지 복선도 있지만 우선 졸속적으로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한 일의 비효율성과 낭비를 염두에 측면이 크다. 동시에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유산을 물려주는 것 역시 우리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차대한 당면문제임을 환기해 주고 싶은 생각도 든다. 당연히 무신경과 무관심으로 인해 차후에 후손들에게 전가되는 부끄러운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두루 잘 아는 바와 같이 백운산은 신라 말 큰 스님 도선국사의 행적이 서린 영험한 곳으로 호남 정맥을 이어주는 정기어린 영산(靈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는 지리산과는 섬진강을 사이좋게 끌어안고 있는데, 섬진강 550리 물길이 백운산에 이르러 완성되고 있다. 특히 백운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울창한 원시림을 끼고 돌아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아니 사시사철 심신이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과 재충전의 장소로 각광을 받는다.

명산은 단순히 지역민들에게만 혜택을 베푸는데 그치지 않는다. 광양을 찾는 전국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백운산의 웅장함과 자태에 매력을 느껴 다시 찾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뿐만 아니다. 백운산에서 나오는 여러 풍성한 작물로 인해 지역민들의 실생활에도 큰 보탬이 되어 왔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앞으로 더 큰 미래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생물산업 분야를 포함해서 환경적 가치가 국가와 지역사회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관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운산이 지금 수난을 당할 처지에 있다. 한전의 송전탑 추가 설치문제로 백운산 주변의 주민은 물론 지역사회도 속앓이를 하고 있다.

한전은 몇 년 전부터 산업 전력의 수요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합법적인 절차에 의거해 추진해 온 사업인 만큼 지역민들이 반발한다고 해서 사업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인 것 같다. 43기의 철탑을 추가로 설치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전력의 원활한 공급이야말로 산업의 동맥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한 문명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전혀 훼손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지역민들이 한전의 송전탑 설치를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인 아닌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광양의 시민단체를 비롯해 지역민들이 주축이 된 ‘백운산 지키기 범시민 대책위’에서도 얼마 전 이런 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눈 결과 시민합의안으로 결정한 지중화 방안을 적극 수용할 것으로 촉구한 바 있다. 광양시와 시의회도 지역민의 이러한 입장을 적극 지지한 상태다.

하지만 한전은 지중화 방안을 수용할 경우 소요 경비도 몇 천 억원이 추가(광양의 시민단체 2100억원 추정/한전호남본부 3800억원 주장)되거니와 여러 어려움을 토로한다는 얘기만 들려올 뿐 현재로서는 뚜렷한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태다. 하지만 지역사회가 명분 없이 반대만 하는 것도 아니고 지중화 방안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경제적 효율성을 고려한 대안도 제시한 만큼 추진하는 쪽에서는 다소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시민의 요구안에 대해 가능한 빨리 건설적인 입장을 내놓는 게 순리다.

혹시라도 경제적인 잣대와 효율성 그리고 법의 우위를 내세워 지역민의 바람을 지역이기주의 소산이나 님비현상쯤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지역사회의 커다란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강용재 ‘백운산 지키기 범시민 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몇 분들에게서 인터뷰 도중 그러한 결의(?)를 느꼈다.

동시에 한전 경영진의 전향적 자세를 요구하면서 송전탑을 지중화한 국내사례를 중심으로 백운산 송전탑의 지중화방안이 갖는 객관적 정당성, 미래지향적 가치, 그리고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막연한 정서에 기댄 호소는 공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지역민의 자발적 참여와 공감의 폭을 더욱 확산시키려는 지속적인 노력도 요구된다.

일찍이 미국 서부에 살았던 한 인디언 추장은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며 문명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자만에 빠진 인간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조상 대대로 살던 터전을 빼앗겨 가면서도 미국인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 건설을 위해 오만해져 가는 그들을 훈계하는 작은 목소리가 유난히 큰 울림으로 가슴에 깊이 와 닿는 이유가 무엇일까. 호남의 영산(靈山) 백운산이 더 이상 훼손되고 상처받지 않도록 모두의 지혜와 용단이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