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묘 문화재 지정 신청의 역사적 의미
지석묘 문화재 지정 신청의 역사적 의미
  • 태인
  • 승인 2008.05.29 08:39
  • 호수 26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고인돌(지석묘)이 흔한 곳은 없다.
한반도 전 지역에 걸쳐 고인돌이 골고루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옥룡의 남정마을 지석묘군 외에도 현재까지 43개군 269기의 지석묘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고인돌(支石墓)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을 탁자식 또는 북방식이라 하고,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을 바둑판식 또는 남방식이라 한다.
또 받침돌이 없는 것을 개석식이라고 한다. 우리지역의 고인돌은 바둑판식과 개석식이 대부분이다. 한편 북방식으로는 강화도와 고창의 고인돌이 유명하다.

남정마을의 지석묘는 발굴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무덤 아래 부장품이나 매장 형태 등에 대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지석묘 일대가 논과 마을이 존재하고 있어 일정 세력을 형성한 집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주위에서 작은 고인돌군이 더 발견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인돌은 권력의 상징이다.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이는 계급사회였던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고인돌의 경우 수백톤의 덮개돌을 옮기기 위해선 적어도 수많은 사람이 동원됐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인돌의 주인이 누렸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개석식 고인돌도 광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받침돌 없이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얹은 개석식의 특징은 성혈(性穴)이다. 성혈은 덮개돌에서 나타나는 선이나 작은 구멍으로 사람들이 돌멩이 등으로 부지런히 문질러 새겼다.

성혈의 기본 바탕은 거석신앙으로 원시종교의 형태다. 학계에선 “국내에서 발견되고 있는 성혈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풍요와 다산을 기원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밖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작은 돌멩이로 성혈을 열심히 문질러 그 돌이 바위에 붙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하늘을 숭배해 태양과 별자리를 따라 새겼다는 해석도 있다. 다만 성혈이 새겨진 시기는 정확히 알 방도가 없다.

이번 남정마을 지석묘군의 문화재 지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지역 고인돌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관리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특히 이곳은 야트막한 동산에 자리해 범상치 않은 장소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현재로선 당시 사람들의 제전(祭奠)이 이뤄졌던 성스러운 곳으로 짐작할 수밖에. 혹자는 말한다. 고인돌의 경우 너무 많아 희소성이 없다고. 하지만 역사적 가치는 반구대 암각화만큼 중요하다고 전하고 싶다.

광양시도 그저 하나의 고인돌을 소개하기보다는 고인돌에 담긴 역사적 중요성을 알리는데 중점을 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