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시인의 만남
정병욱 교수와 윤동주 시인의 만남
  • 광양뉴스
  • 승인 2014.09.01 09:57
  • 호수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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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의 대가 정병욱 10
조동래 시인ㆍ수필가
지난주에 이어 그 내용은 마치고, 다음호에는 정병욱 교수에 관해 요점만 고찰하고자 한다. 전회 연속,‘윤일주는 4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윤동주의 묘는 옛 은진중학교로 이어지는 구릉의 동산교회묘지에 있다고 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연길에 도착한 며칠 후 사람을 띄워 윤동주의 묘소를 찾게 했다. 교수의 부탁을 받은 사람들은 옛 동산교회묘지를 구석구석 뒤지며 다녔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연길시민은 1985년 2월 개방도시로 돼 외국인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윤동주의 묘지는 연길시가 아니라 룡정진의 교외에 있었다. 공안국의 허가증이 나오자 5월 14일 오오무라 부부는 연변대학 권철, 리해산 교수를 동행케 했다. 먼저 옛 대성중학교터에 있는 룡정중학교를 방문하고 현지의 향토 역사에 밝은 한 철 선생을 동행케 요청했다.

옛 동산교회 묘지로 올라가는 흙길, 승용차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는 구릉의 급경사지에 밭과 어설픈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선에서 회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북에서 남동으로 지나가고 그 좌측에 멀리바라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구릉의 여기저기에 흙 둔덕과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산 밑쪽의 묘비들은 넘어지고 부서진 게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윤동주의 묘비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 고생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랴!  앞에서 걸어가던 리해산 교수가 드디어 큼직한 비석을 찾아가 정면을 보니《시인 윤동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는 글발이 보인다. 끝내 찾아낸 것이다. 

윤동주의 묘는 산기슭에서 지프차로 10~15분 올라가서 비탈길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있었다. 5월 중순이건만 북간도의 날씨라 새싹은 아직 나지 않고 지난해의 마른 풀대가 어설프게 덮여있었다. 원래 붕긋하게 성토했을 봉분, 그 앞에 서남쪽을 향해 묘비는 서있었다.

정면에《시인 윤동주 묘비》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 22자 8행, 정면으로 보아서 우측면에 22자 3행, 좌측면에 25자 3행에 걸쳐 한문(漢文)으로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그날은 묘비 주위의 마른 풀대들을 꺾어버리고 돌들을 치우기만 하고 산을 내렸다. 5월 19일 오오무라는 연변대학의 여러 선생 그리고 연변의 유지들인 심동검, 정영진 등 일행 9명과 함께 지프차 두 대에 분승하여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두만강에서 잡은 송어에 조선산 명태를 준비하여 조선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윤동주의 묘소를 찾은 뒤를 이어 오오무라 교수와 연변의 학자들은 선후로 룡정중학교에서 윤동주의 학적부를 발견했고 송몽규의 무덤, 윤동주의 생가 터, 명동교회를 비롯하여 윤동주의 삶의 궤적과 그 주변의 많은 사실들을 밝혀냈다.

오오무라 교수의 노력은 연변에 윤동주의 붐을 몰아왔으며 연변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서 자랐고 이 땅에 묻혀있는 위대한 시인의 순절한 삶과 주옥같은 시편들을 두고 커다란 흥분에 잠기게 되었다.’

윤일주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형 동주의 묘비를 1945년 6월 14일 가족모두가 참여해 수립했다. 그리고 본인은 1946년 월남 후 다시는 그곳에 가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형의 묘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세월도 40년이나 흘러 연길시가 아니라 룡정진으로 바뀐 것을 몰랐고, 개발과 지문까지 옮겼기 때문이다. 민족시인의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은 시 31수 72페이지로 1948년 1월 정음사에서 출간했다.

그 후 1955년 제2판과 1968년 제3판 증보판부터 수록된 작품(시·동요·산문)은 증가를 거듭해 현재 129편으로 집계되고 있다. 상재된 것 중 상당부분은 동주의 여동생 혜원(남편 오형범)씨의 공이 크다.

그는 동생 일주로부터 형이 학창시절에 써둔 작품과 유품을 모두 찾아 서울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짐을 챙겨 이고지고 1947년 4월 용정을 떠났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서울로 직행하지 못하고 중간지인 정진, 원산에서 머물기도 했다.

그 후 계속 남진했으며 드디어 1948년 12월,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동생 일주를 만나 작품만 넘겨줬고, 사진첩을 운반도중 부담스러워 친척에게 부탁했더니 그가 남하중 기차간에서 일경의 검색에 겁을 먹고 창밖으로 던져버렸다는 아쉬움만 전했다. <다음호에 계속>   /글 조동래 시인ㆍ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