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단상>이명래 고약(膏藥)을 아시나요
<문화단상>이명래 고약(膏藥)을 아시나요
  • 광양뉴스
  • 승인 2014.12.22 10:47
  • 호수 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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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동 래<시인·수필가>
창업주 이명래(1890~1952)는 조선 말기 천주교 집안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족들은 본래 서울 남산동에서 살았으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충남아산군 인주면 공세리의 한 성당부근으로 이사를 했다.

소년시절 이명래는 성당에서 심부름을 하며 프랑스인 신부에게 약 조제법과 치료법을 배우며 자랐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포교를 위해 의학지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드비즈라는 이름의 프랑스신부도 한문과 라틴어가 병기된 한방의약서를 지닌 채 치료와 선교를 병행했다. 당시 병으로 성당을 찾은 사람 중에는 부스럼(종기)환자들이 많았던 것은 생활은 궁핍하고 환경은 비위생적인 생활이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이명래는 신부에게 물려받은 한방 의서를 바탕으로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을 만들었다. 얼마전 삼성경제연구소 조사에서‘한국의 역대 최고 히트상품’8위로 꼽힌 이명래 고약은 그 원형이다. 이명래가 만든 고약은 10여 가지, 한방 생약 재를 주성분으로 한다. 한지에 싸여있는 고약을 불에 녹여 환부에 붙이면 고약 안에 박혀있는 콩알모양의‘발근 고’가 농을 빨아냈다. 그는 불과 16세에 아산에서 명래한의원을 개업해 본격진료를 시작했다.

30세가 되던 해에 서울로 터전을 옮긴 이명래는 중림동의 허름한 집에서 고약을 만들어 팔기시작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새벽미사를 보고 진료를 시작했는데, 고약의 효험에 대한 입소문이 널리 퍼지자 밤늦게 까지 손님이 번호표를 들고 대기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62세)에 피란 갔던 경기 평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이명래 고약 제조는 이명래 고약집과 명래제약소로 나뉘었다.

이명래 고약집은 1936년 이명래의 둘째 딸과 결혼한 사위 이광진씨가 운영했다. 이씨는 보성전문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이명래의 두 아들이 모두 어려서 사망한 탓에 결혼 후 고약 제조법을 배운 그가 가업을 이은 것이다. 처음 중림동에 있던 고약 집은 해방 후 애오개(지금의 충정로 종근당 건물 뒤편)로 자리를 옮겼다.

1996년 이씨가 작고한 후에는 이씨의 사위인 임재형씨가 고약 집을 물려받았다. 이명래 고약집이 한약방을 찾은 환자들에게 고약을 판매한 반면, 이명래의 막내 딸 이용재씨가 1956년 설립한 명래제약소는 종로구 관철동에 사업장을 갖추고 고약을 대량생산했다. 이씨는 경성의전(경성제국대학부설,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전신)을 졸업하고 내과 의사로 일했다.

명래 제약소에서 생산된 고약은 전국의 거의 모든 약국에서 팔렸다.‘잘났지 않은 종기엔 이명래, 이명래 고약’이라는 라디오 광고 카피로 알려진 이명래 고약은 명래 제약소에서 생산해서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명래 고약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가난하던 시절‘국민상비약’의 지위를 누렸다. 높은 인기에 편승해 가짜도 나왔다.

당시 밀가루와 물엿으로 가짜 이명래 고약 10만포를 만들어 판 엄모씨 등 4명이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항생제 등 각종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명래 고약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0년대 초반 명래 제약소는 7 ~ 80만포의 고약을 판매해 1억 원 가량의 매출을 올렸는데, 명래 제약소는 보건복지부로부터 우수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KGMP) 적격업체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자동화 시설을 갖추고 현대화를 시도했다. 고약을 한지에 싸는 방식이외에 밴드 형태로 부착하는 방식도 개발했다.

장년층은 이 고약을 사용하지 않은 자가 없을 듯, 그러나 시대 변화의 파고를 넘기에는 역부족인 듯 두 곳 모두 어려움에 처해 있다. 명래 제약소는 경영악화로 8년 전 부도를 맞고 GP제약이 시설을 인수해 고약을 제조했으나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명래 고약 집은 명래 제약소가 문을 닫은 후에도 명맥을 어어 왔으나 후계자를 찾지 못해 3년 전 문을 닫고 말았으니 모두 사라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