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유배지였던 광양 땅
코끼리 유배지였던 광양 땅
  • 광양뉴스
  • 승인 2015.05.15 20:44
  • 호수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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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시인·수필가>
 역사의 뒤안길을 걷다보면 진실이 가설이 되고 허상이 참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어 흥미롭다. 광양은 20세기를 맞이하면서 영역(領域)을 인근 시군과 수수(授受)한 사건이 있었다. 묘도(猫島)는 여수로, 장도(獐島)와 해창지역 일부는 순천으로 그리고 서면일부까지 교환을 했으나 손해만 본 경우라고들 한다.

 이들 섬과 지역을 잃지 않았다면 관광자원화로 활용할 수 있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미 지상 보도됐고, 우리고장이 코끼리 유배지라는 내용에 아쉬움이 절실해 언급해 본다.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 죄에 해당됩니다. 전라도 땅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1413년(태종 13년)의 일이다. 병조판서 유정현의 진언에 따라 ‘코끼리’가 유배를 떠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가해자는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가‘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문제의 코끼리가 공조판서인 이우(李玗)를 밟아 죽인 사건 때문이다. 사유는 이우가“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화가 난 코끼리가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1년에 콩 수백 석을 먹어서 조정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혔는데,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조정에서 논의 했더니 되돌려 보내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김종직이 나서 되돌려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사육사 까지 왔으니 사육해야한다는 청에 따라 사육은 하되 죄를 저질렀으니 죄를 물어 귀향을 보내되, 따뜻하고 방목장이던 장도로 보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배를 당한 코끼리는 사육사까지 따라오기는 했으나 문제가 많으니, 전라도 관찰사가 상소를 올렸는데, “코끼리는 좀체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라고 해 태종 임금조차‘울컥’하게 만든 상소문으로 인해 코끼리는 유배지에서 풀려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코끼리가 유배됐던 곳은 전라도 장도(獐島, 광양현 땅)는 조선시대부터 동물들의 방목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율촌산업단지 개발로 육지와 연결돼있으며, 채토장으로 사용해 원형이 일부 훼손된 상태다. 하지만 이 코끼리의 운명은 기구했다.

 1420년(세종 2년) 전라도 관찰사는 코끼리 사육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소를 다시 올린다. 상소문을 본 대왕께서는“제발 죽이지 마라”였다. 6년 뒤“귀양에서 풀린 코끼리를 변방 지방관들이 교대로 사육하게 되었다.

 상소문의 내용은 너무 많은 먹이(하루 청초 50kg와 대두 1말)를 축내고 있어 백성들만 괴롭혔기 때문에, 제발 충청도와 경상도 지방까지 돌아가며 키우게 해주소서.”따라서 전라·충청·경상도 등 3도가 코끼리 한 마리 사육을 맡는, 이른바 순번사육을 제안한 것을 왕(太宗)은 전라도 관찰사의 상소를 가납했던 것이다.

 이로써 코끼리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를 떠돌며 사육 당하는 처지가 됐다. ‘떠돌이’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까. 문제의 코끼리가 또 사고를 쳤다. 1421년(세종 3년) 충청도 공주에서 코끼리를 돌보던 사육사가 그만 코끼리에 채여 사망하는 사건이 또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폭발했다.“코끼리는 나라에 유익한 동물이 아닙니다. 먹이는 꼴(草)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10배나 됩니다.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 먹는데, 1년으로 치면 쌀 48섬, 콩 24섬입니다. 게다가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고 유해할 뿐입니다. 다시 섬 가운데 목장으로 보내주소서.”

 상소문을 받아든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코끼리를 보내라”고 명한 뒤 안전을 당부한다. “제발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는 어명이 있기는 했으나 이후에는 어디로 옮겼는지, 수명까지도 알 수가 없다.

 그뿐인가 공작새가 유배를 떠나야 했던 사연을 아는 이는 드물다. 1589년(선조 22년)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이다. 일본의 사신인 종의지(宗義智, 대마도주)가 공작 1쌍과 조총, 그리고 창과 칼 몇 점을 바쳤으니 참 묘한 일이다.

 지금도 외교에 동물교환이 있으니 전례로 남아있는 듯하다. 보도내용과 전설일부를 모아 본 것임을 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