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출두요
암행어사 출두요
  • 광양뉴스
  • 승인 2015.09.04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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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수필가
조동래 시인·수필가

요즘 암행어사를 각 고을에 보내 감찰을 한다면 어느 기관의 역할과 어느 곳을 할지 주석(酒席)마다 다른 결론을 내는 것이 세속의 풍경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의견은 감사원과 검찰의 역할이란 것이 보편적인 언사이다. 그러나 옛 암행어사처럼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자가 있을까 하는 염려가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있다.

더듬어보니 어사는 일반어사와 암행어사 두 종류가 있었다. 일반어사는 공개적으로 지명되고 출발과 현지에서 하는 일도 공개이며 이조(吏曹)에서 선발해 파견하여 각 지방의 관리가 수행하는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암행어사는 천거한 인물 중 왕이 임명하고 봉서(封書)와 사목(司牧)을 받아 출발했다. 봉서의 내용에 따라 비공개활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암행어사가 귀환해서 서계(書啓)를 제출하지 않거나 대필시킨 사실이 들어나면 추고(推考)하여 처벌을 받았다.

암행어사 제도는 조선조 중종 11년(1517)부터 시행하여 고종 29년(1892)까지 지속되었으며 전라도 어사 이면상을 끝으로 폐지되었다고 하나 법적으로는 갑오경쟁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어사가 돌아와 왕에게 보고할 때는 서계와 별단(別單)을 각각 한통씩을 작성해 복명하는 날 제출하는데, 서계는 성읍(城邑) 관찰에 관한 특별지시사항, 봉서에 지시된 사항 등을 조사 탑문 한 내용을 보고서 형식에 의해 조목조목 기술한 것이고, 별단은 서계에 미진한 사항 즉 각 지역을 두루 관찰한 사항과 사목에 규정된 일반적인 폐정사항에 대한 개선책을 담은 의견서로 어사(御使)자신에 대한 평가였으며, 다음 승진에 영향이 미쳤다고 한다. 다만 서계는 필수적이었으나 별단은 임의사항이었다.

어사는 어떤 사람인가? 왕의 특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되는 임시관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사는 당하관(堂下官, 종3품) 중에서 선발했음으로 직급은 높은 편은 아니었다. 조선조는 정3품을 기준으로 그 이상은 당상관, 그 이하는 당하관이라 불렀으며 같은 정3품이라도 문신은 통정대부, 무신은 절충장군 이상은 당상관이고, 문신 통훈대부, 무신 어모장군 이하는 당하관으로 분류하였고 당상관은 중신대접을 받았지만 당하관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당하관 중 승정원과 삼사인 예문관 등 임금을 직접 모셔서 임금과 친분이 있는 신료 중에서 선발하여 정3품 이상의 권한을 주었다. 어쩌다 당상관이 선발되면 그를 어사(御史)가 아닌 어사(御使)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어사는 업무를 수행함에 권한을 발동하니 권위와 명예만 있었던 것도 아닌 듯 고단했고 위험도 있었다고 한다. 때로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중종 34년(1539) 강원도에 파견된 암행어사 송기수는 강릉에서 수령의 비리를 증명할 수 있는 불법문서를 적발하고도 이를 도난당했고, 5년 후에 전라도 암행어사 홍양한이 태인현에 이르러 독살로 추정되는 살인을 당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암행어사의 신표(身表)는 마패(馬牌)가 유명하지만 실제로 마패의 용도는 역마(驛馬)를 이용할 수 있는 증표로 암행어사뿐만이 아니라 지방에 출장(出場)가는 관원들도 소지한 예가 많았다.
그러므로 암행어사의 신표로는 마패보다 유척(鍮尺)이 더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를 말하는데, 어사에게는 2개가 지급됐다.

하나는 죄인을 매질할 때 쓰는 태(笞)나 장(杖)의 형구가 법의 규정에 맞는지 실제 확인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토지의 거래를 위한 측량, 시정의 면사(綿絲)의거래, 세금징수의 면포(綿布) 등 길이 준수사항을 확인할 때 사용했다.

암행어사로 선정되면 왕으로부터 봉서(封書)와 사목(事目)을 받았다. 봉서는 일종의 임명장으로 임명취지, 감찰대상 지역의 명칭, 임무에 대한 사항 등이 조목조목 나열되어 있고, 구체적인 행동강령까지 적고 있었다. 사목은 출발부터 돌아올 때까지 기간(期間)과 거리(距離) 숙박 장소가 지정돼 있고 돌아오는 길까지 명시돼 있었다. 또한 사목은 봉서를 보완할 목적으로 직무상의 준수 규칙과 감찰목적 등이 구체적으로 기재된 복무수칙이다.

그런데 봉서의 표면에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이라 적혀있었다. 그것은 남대문밖에 가서 열어보라는 뜻이고, 봉서를 받으면 즉시 출발해야 했다. 어사가 지방관내에 들어가면 수령(首領)의 비리를 탐지하기 위해 변장(남루한 옷과 찢어진 삿갓으로)하고 풍진노숙하며 여론을 듣고 지방관이 백성들로부터 원성이 있는지, 선정을 베푸는지 염탐 후, 고을에 들어가 수령의 관가에서 개좌하는 것을 출두라 한다. 그 방법은 관가의 삼문(三門)을 역졸이나 대리(大吏)가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어사출두요!’를 외친다.      

그때 암행어사는 잠정적인 장소에서 유유히 관가로 행차하여 수령과 이속의 영접을 받으면서 동헌(東軒)대청에 착석(着席) 개좌(開坐)한다. 그리고 번열(反閱, 공문서의 검열)과 번고(反庫, 창고의 검열))을 한다. 불법문서가 현장에서 발각되면 수령의 관인과 병부(兵符)를 압수하고 창고에는 ‘봉고(封庫)’라고 2자로 쓰고 백지에 마패로 날인하여 창고 문에 붙인다.

본고(本庫)가 붙여지면 관군이 이를 지키고 어사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다. 그리고 감옥(監獄)에 수감된 죄수를 점검하고 억울한 사람이 있으며 재심해서 풀어주고, 양민을 괴롭히는 향토제후를 적발해 체포구금하고 처벌했다.

수령이외의 향리는 어사가 직단(直斷)파직하였으나 수령파직의 죄를 적발하면 문서와 내용을 중앙에 보내 왕이 이를 보고 조치토록 했다. 박문수 같은 어사가 그리워지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