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공(功) 과(過)와 역사
박정희의 공(功) 과(過)와 역사
  • 광양뉴스
  • 승인 2015.11.09 11:05
  • 호수 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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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우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전남상담소 소장>

  역사는 단 한 표를 더 얻는 것으로 승자를 확정 짓는 선거와 다르다. 박정희대통령의 공을 생각하면 한때 북한의 원조까지 받았을 만큼 가난에 찌들었던 우리나라를 새마을운동, 경부고속도로, 경제개발5개년계획, 쌀 자급자족, 중화학공업육성, 국민의무교육 실현, 치산녹화, 포항제철소 준공, 수출100억불달성 등 수많은 업적을 국민들의 피와 땀, 참여했던 관리들의 노력과 함께 오랜 집권 기간만큼이나 대한민국의 발전에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공이 많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2014년 구미시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반신반인 이라고까지 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를 간단하게 짚고 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17년 경북구미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사범학교합격 후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그만두고, 1939년 만주군관학교(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위한 친일훈련소)에 입학 후 창씨개명(다카키마시오)을 하고 1942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육사에 입학 2년 후 수석졸업을 하게 된다.

  졸업식에서“나는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천황폐하께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1944년 만주군 제8단 부관복무기간 중 1945년 일본항복으로 강제무장해제 당하고 귀국 1946년 조선경비 사관학교(현 육사)에 입학 한다. 이후 남로당에 입당 여순반란사건 등으로 좌익으로 색출 되지만 우여곡절 끝에 살아나 1950년 6, 25전쟁으로 군에 복직을 하게 된다. 1961년 5월 16일 집권민주당의 신·구파의 갈등과 분열 사회세력의 불만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군사정변(쿠데타)을 일으켜 군정의 장기집권(5대~9대)의 길을 열게 된다. 집권기간 무소불휘로 악명 높았던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972년 10월 법관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국회 해산권, 대통령 임기 6년에 횟수를 제한하지 않는 법을 만들고 대통령선출을 국민직접선거에서 간선으로 바꾸는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반대하던 자들을 색출 사형선고(인혁당사건)18시간 만에 전격 처형 해버린다.

  참고로 유신체제에서 박정희는 대의원 2359명 찬성에 무효 2표로 8대 대통령에 9대에는 2578명 찬성, 무효 1표로 당선된다. 10대 최규화 2549명 찬성, 무효 84표, 11대 전두환 2525명 찬성에 무효 1표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주의를 말살하기도 했다. 국가발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 포장으로 국민의 희생을 정당화하면서 과를 잃어버리라고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한때 우리는 존엄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살았었다. 극장에서 대한늬우스를 봐야했고 남녀고등학생은 교련을, 길 가던 국민은 걸음을 멈추고 국기 하강식 의식에 참여해야 했으며, 선거 때만 되면 북한군이 전진배치 됐다는 소식을 듣고 살아야만 했었다. 1965년 6월 22일 전국대학생들의 데모, 국민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교령과 함께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한일협정을 체결한다. 섣부른 한일협정체결은 경제개발 론을 앞세워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이라는 것만 남긴 체 지금도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문제와 같은 한일 간 첨예한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무상과 차관을 합쳐 3~5억불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의 동력은 오히려 월남파병과 사우디 등 중동에 파견된 노동자, 파독간호사 광부들의 희생이 절대적이었다. 애초 군사쿠데타 이후 처음 6개항의 혁명공약 중 1.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2·5생략)6.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집권 후에는 오히려 측근조차 반대했던 장기집권의 초석을 다졌다. 한세대를 일제강점기에 살아야만했던 사람으로 조국해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입신을 위한 개인의 결정을 3자가 재단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박근혜대통령의 경우 자식 된 도리로서 과를 들먹이는 것은 더더욱 용서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현대사 중심인물로서 18년 대한민국을 통치했던 지도자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과 연구자들을 제외하면 이제 다수의 국민들은 박정희의 공과를 알 수가 없다. 2005년 한나라당대표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연설에서“정권이 역사에 관여할 경우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재단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역사에 관한 일은 국민과 역사학자들의 판단이다”라고 했다. 때마침 교과서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역사학자 90%와 다수의 국민이 반대를 하고 있다. 민주적 다양성이 배제되고 획일적인 역사로 회귀하는데 찬성하지 않으면 반역자요 비정상으로 낙인찍은 것은 독재적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