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5>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5>
  • 광양뉴스
  • 승인 2016.03.04 20:22
  • 호수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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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ㆍ수필가

송강 정철이 남긴 관록과 문학의 세계

 

  넓은 바다를 행해 도도히 흘러가던 물결은 조작된 무고(誣告)로 파고가 높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소윤은 대윤이 장악하고 있던 세력을 제거하고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계책을 꾸미는 한편, 윤원형의 첩(妾)이었던 난정(蘭貞)으로 하여금 문정대비에게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케 한다.

  이로써 윤임과 사림파 세력은 역모 죄로 대대적인 화옥(禍獄)을 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윤임의 생질(甥姪)이며 송강의 매부이던 계림군은 역모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송강 집안은 대윤 윤임계열의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역모를 꾀했다는 협의를 받은 계림군은 처음에는 궁궐을 빠져나와 함경도 안변의 황룡사(黃龍寺)안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었다. 당시의 정세는 역모를 주도하거나 참가한 사람도 살아남기 어려웠다. 심지어 9족을 멸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살기 위해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원들이 몰래 그 하인의 뒤를 밟은 결과 한 달 뒤에 붙들려왔다. 그는 경회루 남쪽 뜰에서 쇠를 불에 달구어 지지는가 하면, 무릎을 틀에 넣고 비틀어 부수는 고문을 함에 견디지 못하고 죄를 인정함에 따라 처형당하게 된다.

  그렇다고 송강의 아버지와 형이 사면으로 풀려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궁중의 사온서(술 빚는 곳)의 책임자였던 아버지는 함경도 정영(定平)으로 유배되고, 맏형이던 자(滋:이조정랑)는 전라도 광양현(光陽縣)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머물렀다. 아버지는 곧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맏형은 풀려나지 못했다.

  또다시 사건은 재발했다. 사화가 일어 난지 2년 후인 1547년 이른바 ‘벽서사건(全羅道:良才  驛)’이 터졌으며 그 내용은 문정대비의 수렵정치와 거기에 빌붙어있는 간신배들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소윤 윤원형측이 반대세력인 대윤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술책이었다. 사건이 터진 것을 기화로 소윤 칙에서는 의도했던 바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난 을사사화 때 처벌이 미흡했기 때문이고 그 때 관련자들 가운데 풀려난 자들이 돌아다니며 저지른 행동이라 몰아붙여 잔당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유배당했으며 송강의 부친도 붙들려 이번에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다.

  특히 광양에서 2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맏형까지 재차 붙들려 와 매를 맞고, 함경도 두만강 가의 경원(慶源)으로 이배(移配)가게 되었다. 맏형인 자(滋)는 포졸들에게 끌려가든 도중 서울에 당도했으나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대문 밖을 거처 북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온 어머니가 아들을 붙잡고 통곡을 하며 자신의 속옷을 벗어 아들에게 입혀주는 광경이 벌어졌다. 그러나 매를 맞은 상처가 심해 경원으로 가는 도중, 길에서 32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유배는 혹독한 형벌이고, 의금부나 형조에서 유배형을 받으면 도사(都事) 또는 나장(羅將)들이 지정된 유배지까지 압송하여 현지 수령에게 인계하면 수령은 죄인을 지키는 사람에게 위탁한다. 죄인을 지키는 사람은 그 지방의 유력자로써 한 채의 집을 제공하고 죄인의 감시와 보호하는 책임을 졌다. 죄인의 생활비는 그 고을이 부담하라는 특명이 없는 한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임으로 가족의 일부 또는 전부가 따라가게 마련이었다.

  유배는 원칙으로 기한이 없이 종신형으로 되어 있었으나 단순한 이동이나 사면으로 형이 해제되어 풀려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송강은 10대 초반에 아버지의 유배지에 따라다니며 고난에 찬 생활을 하게 된다.

  유년시절 궁중에 드나들며 행복했던 그는 10대에 접어들면서 한창 지적, 정서적인 형상을 갖추어야 할 시기에 배움에 큰 뜻을 품을 수 없음은 물론 절망과 허무가 주위를 가득 메운 상황에 던져졌던 것이다. 그는 훗날 죽은 맏형의 시가 걸려있는 정자에 올라 참담했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 올리며 형을 애도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