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8>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8>
  • 광양뉴스
  • 승인 2016.03.25 20:54
  • 호수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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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관록으로 본 연보
조동래 시인ㆍ수필가

필부의 일생을 조명하기도 버거운데 중앙정치무대에서 관직을 수행한 고관의 평전을 열거하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특히 조선조 때 당파의 회오리를 넘나든 관료나 선비들은 평온한 삶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망국의 풍조라 비판했던 당파는 도대체 언제 발생했고 그 폐해는 얼마였을까. 그 뿌리가 내리고 군왕의 힘을 무력화시킨 것은 오래된 병폐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처음에는 학연·지연·문벌로 형성된 모임들이 점차 학풍을 배경으로 형태가 변질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시기는 영조 때 표출되어 심한 갈등을 낳았고 탕평책을 써 본들 이미 도를 넘은 위력은 국왕도 평정할 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 내용을 학파와 당파로 구분해보면 우선 학파란 기호학파와 영남학파가 있었다. 기호학파는 강원ㆍ경기ㆍ황해ㆍ충청ㆍ전라도 등 5개도를 합해 운집되었으며, 대표인물은 이이(李珥 : 栗谷)  선생의 학맥이었다. 다만 함경도와 평안도는 학자가 적어 기호학에 들지 못했고 다른 학파를 형성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영남학파는 경상도의 동북부 지역의 선비들로 형성되었으며 대표는 이황(李滉 : 退溪)을 우두머리로 삼았다. 또한 경남 서남부 지역은 조식(曹植 : 南冥)선생을 중심으로 형성되기는 했으나 우두머리인 조식선생은 벼슬에 출사하지 않고 후학양성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고 영남학파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세자 책봉부터 당파로 대표되는 동인과 서인은 심한 갈등과 모략이 난무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서인의 영수 위치까지 다가선 송강은 아버지가 귀양에서 풀려나 담양 창평으로 처음 내려 온 것이 16세 때이다.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진사시와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출사할 때까지 10여년을 창평에서 성장하고 성숙해 갔던 것이다.

그는 창평으로 고향처럼 내려온 것은 모두 5회째로 기록돼 있다. 처음은 아버지를 따라 내려왔고 그다음 네 번은 본인이 귀양에서 풀려나면 담양으로 하향했던 것이다. 

첫 번째 낙향은 40세인 1575년 선조 8년 6월에 시묘 살이(母親喪)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가 내사시정 사인, 홍문관 직제학, 성균관 사성, 그리고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동서 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서인의 주요인사로서 동인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율곡에게 당쟁으로 빗어지는 간극의 조정을 조정해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창평으로 낙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임금은 장차 크게 등용하겠다며 만류했으나 끝내 낙향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해 10월 이후 42세가 될 때까지 약 2년간 창평에서 생활했다. 이 기간동안 선조임금으로부터 여러 번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드디어 43세 되던 해인 1578년 5월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으로 승진되었다.

11월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그즈음에 벌어진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 옥사처리 문제로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받아 직책이 바뀌었다. 그러나 12월 성균관 대사성·병조참지에 제수되지만, 이수의 옥사 이후 계속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6월에 형조참의, 우부승지, 8월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지만 역시 나가지 않았다.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다가 정치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그동안 머물러 있던 서울 및 고양군(高陽郡) 음죽을 떠나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니 이것이 두 번째이다.

그런 후 세 번째 낙향을 했으나 46세가 되던 해 12월에 왕의 특명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예리한 판단으로 관찰한 그는 전라도전역에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하여 개혁함으로써 백성들로 부터 큰 칭송을 받았다.

그 무렵 조헌(趙憲)과 처음 만나 우여곡절 끝에 돈독한 교분을 쌓게 된다. 그리고 연속 승차하였으나 더없는 지기였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곡(哭)함은 물론 애도의 시를 지어 남기기도 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