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0> 강항선생의 시 30수의 비밀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0> 강항선생의 시 30수의 비밀
  • 광양뉴스
  • 승인 2016.04.08 19:50
  • 호수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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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수필가
조동래 시인·수필가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 있는 수월정은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 인물에 관해 연혁을 탐구해 보면 이 정자(亭子)을 세운 나주 목사 정설(鄭渫), 시를 지은 수은(睡隱) 강항(姜沆)선생, 정기를 쓴 송강(松江) 정철(鄭澈) 이 세분은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해 이의 연관성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송강은 앞에서 언급했으니 이장에서는 시를 지은 강항 선생을 찾아가고자 한다. 강항 선생이 지은 시 30수는 광양읍지(1925년)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선생에 관해 기술한다. 강항은 조선조 명종 22년(1567)5월 17일 영광군 불갑면 유봉리에서 몽오(夢梧) 강극겸(姜克儉  公)의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선생의 선대를 살피면 본관은 진주(晉州)요, 고조는 휘 학손이니 봉훈랑으로 장례원 사평벼슬을 지냈다.

고조비(高祖母)는 공인 고령 신씨이며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손자로 관찰사를 역임한 신명의 딸이었다. 증조부의 휘는 향수니 조산대부로 상의원 별제를 지냈다. 증조비(曾祖母)는 영인 부인 안씨다. 그리고 조(祖)휘는 오복이니 어모장군 충좌위 부호군이요 조비는 숙인 제주양씨다.

강항은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범상치 않았고 4세 때부터 백형 해(海)로 부터 수학(修學) 했다. 56세 때 전라감사 신응시가 각자로 하여금 시 짓기를 명하자‘脚到萬里心敎脚’이라고 응해 탄복했다. 또한 7세 때 맹자(孟子) 1질을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함에 떠돌며 책을 팔던 상인이 천재라 탄복하고 책 한질을 무상으로 주자 사양하니 정자나무에 걸어놓고 떠나니 후에 이곳에 정자를 지어 맹자정(孟子亭)이라 불렀다.

선생은 다음해에 통감강목을 통달하였음으로 무장 고을에 강목 촌이 있다. 가문은 3대가 문행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기억하는 특질이 있어 남들보다 뛰어나 스스로 학문을 할 줄 알았고 번거롭게 되풀이하여 가르치는 일이 없었다. 겨우 9세 때 이미 문장 능력이 있어 이 때 지은「어려서 이룩됨이 천성과 같다(幼成苦天性)」라는 것은 문사의 이치가 두 경지에 도달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외우고 전하였으니 모두가 대대로 문장집안의 내림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선생은 14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지나쳐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향시에 합격하였고, 21세 때 향시 삼장(三場)에 모두 합격했으며 연속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다. 그해에 관례로 참봉 김봉(金琫)의 딸 진주 김 씨와 혼사를 이루었다. 백형은 학문으로 이름이 드러나 세상에서 손꼽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신묘 년에 일어난 기축옥사가 일어나 억울하게 얽혀, 짐을 진 것을 피하지 못하자 선생은 마음 아파하며 홀로 나가서 스스로를 지켰다. 그때 우계 성혼선생께서 여러 소인배에게 마음을 두었다가 문하가 쓸쓸했는데, 공이 멀리서 찾아가 뵈니 우계선생은 그에게 단아하고 진실 됨을 칭찬하였다. 선생은 선조 27년(27세)광해군이 잔주의 분조(分朝)에서 시행한 정시에서 병과로 합격하였다. 

그 후 승정원의 가랑으로 경연 자리에 입장한 사람이 거의 이십 여명이었는데 당시에 전쟁을 겪은 뒤라 무관출신 벼슬아치가 빽빽이 늘어서서 한 낮에 이르도록 임금에게 아뢰고 여러 신하들도 의논을 드려 말들이 분규 되었는데 공께서는 귀로 챙기고 눈으로 섭렵하였고 마음으로는 생각하고 손으로 따라가 기록하여 쓴 것이 물 흐르듯 하여 마치 신의 도움이 있는 것처럼 하니 익숙한 말과 펼친 글이 구김살과 막힘이 없었다.

임금께서 놀라고 기특히 여겨 내려와 선생의 성명을 물으시고 깊이 칭찬하여 상을 줌으로 관례에 따라 박사가 되고 병신년에 성균관 전적으로 옮기고 겨울에는 공조좌랑에 제수 되었다가 형조로 옮겼다.
그리고 휴가를 얻어 고향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지방에서 소금과 저린 고기 등을 수집하고 백미 100석을 모아 사촌동생 강락으로 하여금 고종후ㆍ김천일ㆍ최경장에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군량미를 더 확보해 의병을 도우려 했으나 왜군이 접근해 옴에 따라 탈출을 기도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